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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66, 터키 차나칼레 2-2: 최악의 전투, 겔리볼루(Gelibolu) 전쟁터에 서서(20190429)

경계넘기 2020. 8. 29. 16:14

 

 

최악의 전투, 겔리볼루(Gelibolu) 전쟁터에 서서

 

 

최악의 전투라고 불리는 갈리폴리(Gallipoli), 즉 겔리볼루(Gelibolu) 전투란 무엇일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용어를 먼저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의 유럽 쪽에 있는 반도는 겔리볼루(Gelibolu) 또는 갈리폴리(Gallipoli)라 불린다. 갈리폴리는 유럽인들이 주로 부르는 용어고, 터키인들은 이곳을 겔리볼루라고 부른다. 유럽식 역사를 배운 우리에게 갈리폴리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지만, 이곳이 엄연히 터키 영토인 이상 터키의 공식 명칭인 겔리볼루로 부르는 것이 맞다고 본다. 국제적으로도 많이들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해협을 지칭하는 다르다넬스(Dardanelles)도 유럽인들이 부르는 명칭이고 터키의 정식 명칭은 해협을 포함하고 있는 주()의 이름을 따서 차나칼레(Canakkale) 해협으로 부른다. 따라서 다르다넬스 해협도 차나칼레 해협이라고 하는 것이 맞긴 하지만 차나칼레 해협이라는 용어는 터키 이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름인지라 해협 이름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다르다넬스를 사용하려 한다.

 

겔리볼루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 다르다넬스 해협과 겔리볼루 반도에서 영국, 프랑스, 호주와 뉴질랜드 군대로 구성된 협상군과 독일과 함께 동맹국이었던 터키, 당시는 오스만 제국 군대가 격돌한 전투를 말한다.

 

그럼 이 전투를 왜 최악의 전투라고 부르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1915219일 연합군의 포격으로 시작해서 191619일에 연합군의 철수로 끝난, 1년도 되지 않는 이 전투에서만 양측 사상자가 50만에 달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전투였기에 한 전투에서 50만에 이르는 사상자가 나왔을까?

 

이름 모를 수많은 꽃다운 청춘들이 묻힌 그 반도에 가기 전에 겔리볼루 전투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높여 본다. 겔리볼루 전투는 협상국에 속했던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와 함께 협상국 편에 섰던 러시아는 동맹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에 의해 육로와 해로가 모두 봉쇄되면서 철저히 고립되었다. 홀로 막강 독일군을 상대해야 했던 러시아군은 곳곳에서 밀리고 있었고 서부 전선의 붕괴에 직면한 협상군은 독일의 배후인 동부 전선을 공략할 러시아에 대한 지원이 시급했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작전이 바로 겔리볼루 전투다.

 

지원물자를 실은 협상국의 수송 선단이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진입해서 러시아를 지원하고자 한 것이다. 겔리볼루 작전은 크게 두 단계로 전개되었다. 첫 단계는 해군 단독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는 작전이었고, 둘째 단계는 육군이 상륙 작전을 통해 해협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겔리볼루(갈리폴리) 반도와 다르다넬스 해협                                                출처: Wikipedia

 

이 작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다.

 

당시 해군성 장관이었던 그는 일부 해군 장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군만의 단독 작전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고 했다. 처음부터 처칠이 해군 단독 작전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육군과 해군의 합동 작전을 계획했지만 육군성이 반대하면서 작전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육군성은 당시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에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육군의 일부 병력을 이곳으로 이동시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일부 해군 장성들은 왜 반대한 것일까?

 

그 이유는 좁고 긴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편에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의 해안 포대가 즐비했기 때문이다. 가장 좁은 곳은 겨우 1.2km에 불과하고 길이는 61km에 이르는 이 해협을 육군의 지원도 없이 뚫고 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집불통 처칠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2015219일 드디어 영국, 프랑스 함대로 구성된 함대의 첫 함포 사격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강타했다. 해협 양안에 포진한 오스만 제국의 해안포도 대응사격을 하면서 이 좁은 해협은 포성이 진동하고 포연이 자욱했다. 치열한 포격전이 지속되었지만 협상군은 끝내 이곳을 뚫지 못했다. 작전 중 연합국 전함 3척이 침몰하면서 후퇴했다.

 

협상군은 318일 다시 2차 공격을 감행했지만 강렬한 오스만 군대의 저항에 부딪혀 오히려 1차 공격 때보다 더 많은 전함 5척이 침몰하면서 끝내 퇴각했다. 해군만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당시 협상군의 전함을 침몰시킨 것은 해안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해안포는 단 한 대의 배도 침몰시키지 못했다. 전함을 침몰시킨 것은 오스만군이 해협에 깔아 둔 기뢰였다.

 

당시 오스만군은 협상군의 전함에 대항할 이렇다 할 군함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기뢰였다. 그런데 당시에 기뢰 부설 작업은 매우 위험했다. 연합군에게 들키지 않도록 저녁에 몰래 부설해야 하다 보니 불을 밝힐 수 없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자신이 깐 기뢰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오스만군들이 목숨을 걸고 깐 기뢰에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영국 해군의 전함들이 작살이 난 것이다.

 

해군 단독 작전의 실패에 따라 협상군은 육군의 상륙 작전을 통해 먼저 해안포를 장악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동년 425일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으로 구성된 협상군이 겔리볼루 반도에 상륙을 시작했다. 그러나 상륙지점은 폭이 20~30m 밖에 안 되는 좁은 해변에, 더욱이 해변이 끝나는 곳에서부터는 급경사의 비탈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무모한 상륙 작전에 무수한 병력이 죽어나갔고, 겨우 상륙한 병력들도 백병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스만 군대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양측이 많은 사상자만 내면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여기에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 못하면서 식수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서 탈수와 병으로 무수한 병력이 죽어나갔다.

 

 

출처: Wikipedia

 

이 처참한 전투에서도 빛을 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하나는 협상군의 ANZAC이었다.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인 ANZAC은 비록 작전은 실패했지만 오스만 군대와 가장 용맹스럽게 싸운 군대였다. ANZAC은 이 전투에서 전사자만 거의 10만 명에 달했다. 지금도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425일을 ANZAC DAY라고 해서 우리의 현충일처럼 기리는 이유를 알만 하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빛난 사람이 있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 터키의 국부로 칭송을 받는, 우리가 케말 파샤(Kemal Pasha)로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겔리볼루 전투에 사단장으로 파견된 케말은 협상군의 파상 공세 속에서도 오스만 군대를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이 전쟁을 통해 오스만 국민들 속에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이후 지금의 터키를 세우는 동력을 확보하게 된다.

 

 


 

 

오늘 난 바로 그 역사적 현장에 있다.

 

차나칼레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해협을 건너 반도 서안의 Eceabat 마을에서 내렸다. 그리고 겔리볼루 반도를 가로질러 걸어서 반도 동안의 이곳에 왔다. 전장(戰場)의 시작은 Kabatepe Museum, 즉 겔리볼루 전투 박물관에서 시작한다. 

 

 

 

박물관에서 바로 해안 쪽으로 내려간다. 

 

가장 보고 싶은 곳은 상륙 작전이 전개되었던 해안이다. 상륙군의 주력인 ANZAC군이 상륙했던 그 해안. 이름도 ANZAC Cove(안작 해안)이. 원래는 이름 없는 해안이었지만 터키가 이렇게 붙여서 쓰고 있단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이곳 박물관에서도 4km 이상 해안 길을 걸어야 한다.

 

박물관에서 조금 내려가면 바로 해안이다. 에게해다. 에게해도 무척이나 푸르다. 에게해도 지중해의 한 부분이니 지중해 바다는 이렇게 푸른가 보다. 이곳 해안은 대략 1km 정도의 모래사장을 가졌다. 해안의 이름이 박물관 이름인 Kabatepe. 원래는 협상군이 이곳 Kabatepe 해안에 상륙해서 내가 걸어온 평지를 관통해서 반대편 해안포를 공략하려던 것이었다. 해안의 모래사장도 제법 넓고 바로 평지로 이어진다.

 

그런데 강한 물살에 밀려 이곳에서 북쪽으로 3~4km 떨어진 안작 해변에 간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작전은 그대로 밀어붙인 것이고. 만일 이곳 해안에 제대로 도착했다면 상륙도 수월했을 것이고 평지를 걸어서 2시간 만에 반대편 해안포대를 공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에게해가 펼쳐진 해안을 따라서 가는 길은 상쾌하다.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 비록 햇살은 강렬하지만 바람은 선선하다. 해안 길에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들꽃들도 많이 피였다. 그러나 상륙 지점이 가까워지면서 저 아름다운 해안과 들꽃 아래에 수십만의 꽃다운 젊은이가 피를 흘렸다는 생각에 어쩐지 더 처절하고 처참하다. 극과 극은 정말 통하나 보다.

 

 

 

해안 곳곳에는 상륙 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었던 벙커 잔해들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벙커의 두께가 거의 1m 가까이 된다. 그 안에 들어가 해안으로 상륙하는 병력들에게 기관총을 싸대면 상륙군으로서는 대처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안작 해변에 가까워지면서 주변의 다른 해안들에도 전사자들을 위한 군인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다른 부대들이 상륙했던 곳인가 보다. 군인 묘지들은 잘 꾸며져 있다. 터키군이 아닌 주로 연합군들의 묘지다.

 

 

 

해안의 지형도 바뀌었다. Kabatepe 해안을 벗어나자마자 해안의 모래톱은 10~20m 정도로 좁아지고 해안은 바로 40~60도 이르는 가파른 경사로 이어졌다. 때론 절벽을 이루기도 한다. Kabatepe 해안을 벗어나자 평지는 사라지고 급경사의 산지로 바뀌었다. 길은 그 산자락 아래를 깎았다.

 

이런 곳에 수만 명의 병력을 상륙시켰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현지에 대한 철저한 답사와 조사 없이 후방에서 지도만 보고 내린 작전의 결과를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안작 해안에 도착한다.

 

안작 해안도 군인 묘지와 추모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425일이 안작 데이라 매년 이곳에서도 기념식을 한다고 하더니만 4일이 지난 지금 기념식 설비를 치우느라 분주하다.

 

안작 해안도 올라오면서 본 여느 해안과 다르지 않다. 좁고 짧은 해안은 바로 가파른 경사지로 연결된다. 수만 병력이 상륙하기도 힘겹겠지만 완전 군장을 한 병력이 위에서 날아드는 총탄을 피해 가파른 경사지를 오르는 것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지금은 산허리를 깎아 도로를 만들었지만 당시에는 도로조차 없을 터이니 산 능선까지 이어지는 경사지에서 막사 하나 제대로 필 공간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랫말 그대로 전우를 시체를 밟고 올라갈 수밖에 없다.

 

 

 

안작 해안을 벗어나 이번에는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던 곳 중의 하나인 Lone Pine 고지로 향한다.

 

오던 길을 조금 되짚어 가다가 산길을 타고 올라간다. Lone Pine 고지는 안작 해안을 비롯해 반도의 서쪽 해안을 바로 내려다보는 곳이라 상륙 작전에 매우 중요한 고지였다고 한다.

 

 

 

이곳 고지를 뺏고 지키기 위해서 협상군과 오스만군이 백병전을 불사하면서 치열하게 싸웠다고 한다.

 

소나무가 많았던 이 고지 중앙에 특별히 큰 소나무 하나가 서 있어서 Lone Pine 고지라 부른다. 지금도 추모 공원 안에 소나무 하나가 서 있다. 원래 그 나무인지 새로 심은 것인지는 모른다.

 

 

 

해안 길에서 고지로 올라오는 산길은 차가 다닐 수는 있지만 비포장에 거의 등산로다.

 

그냥 걸어오기도 힘든데 당시 상륙군들은 완전 군장을 한 채로 이곳을 달려 올라왔을 것이다. Lone Pine 고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가장 치열한 고지전이 있었다는 곳이 나온다. Lone Pine 고지에서도 보이는데 지금은 기념 공원으로 조성되어 케말 파샤의 동상이 그곳에 있다고 한다. 가고는 싶은데 발걸음을 돌린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다리에 힘도 없고. 박물관 쪽으로 걸어 내려간다.

 

 

 

걸어 내려오는 곳곳이 격전지였나 보다.

 

추모 공원과 묘지가 있다. 한 곳에는 터키군이 영국군 장교를 안고 있는 동상도 나온다. 동상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교전 중에 한 영국군 초급 장교가 총인가 포탄인가에 맞아 고통을 호소하면서 쓰러져 있었다 한다. 잠시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 영국군을 보다 못한 터키군 한 명이 영국군을 들어서 영국군 진지 안에 던져 주고 왔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핀 인간애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내려오는 길 곳곳에도 밀밭이 펼쳐져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밀밭의 파도가 지친 여행자의 발을 보듬어 준다.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죽은 이들이 여행자에게 전하는 손짓 같다. 

 

 

 

여행을 하다보면 때때로 여행자는 낯선 땅에서 아픈 역사들과 마주 해야 한다. 오늘처럼.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