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예레반(Yerevan)
눈을 떠 보니 아침 9시다. 이때까지 한 번도 깬 적이 없었으니 간만에 꿀맛 같은 잠을 잤다. 세상 모르고 잤으니 정말 잘 잤다. 어제 기차에서 코 엄청 골아댄 친구가 가장 큰 역할을 했겠지만, 이틀에 걸친 장거리 이동과 도미토리 방에 사람이 없었던 것도 숙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창밖을 보니 세상이 훤하다. 자세히 보니 눈이 쌓여 있다. 어제만 해도 예레반(Yerevan)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었다.
제법 쌓인 것을 보니 밤새 내렸나 보다. 커튼을 쳐서 자세히 보니 지금도 내린다. 길에는 쌓이지 않았지만 지붕이나 차 위에는 수북이 쌓였다. 함박눈은 아니고 싸라기눈에 좀 가깝다. 예레반이 그다지 춥지 않아서인지 눈을 직접 맞으면 곧 녹아 버린다.
숙소에 손님이란 각각의 방에 한 명씩 딱 3명밖에 없는 것 같다. 내가 일어난 시각에는 아무도 없다. 남녀 겸용 샤워실이 너무 개방적이라 사람 없을 때 바로 샤워 먼저 한다.
조식을 먹는다. 간단한 조식이지만 뷔페식으로 잘 차려져 있다. 간단한 빵과 함께 치즈, 버터, 쨈. 시리얼. 삶은 계란과 귤. 그리고 차와 커피. 사람이 없으니 아예 노트북을 가져와 드라마 한 편을 보면서 편하게 먹는다. 먹고 있으니 어제 본 남자 투숙객도 나온다. 이 친구는 장기투숙객으로 보인다.
이곳도 바쿠(Baku)에서의 호스텔처럼 가정집 같다.
부엌과 거실이 어느 가정집의 모습이다. 관리는 바쿠의 호스텔보다 더 깔끔하다. 물론 그 만큼 가격도 비싸다. 조식이 나오긴 하지만 하루에 4천 드람(AMD), 원화로 환산하면 대충 만원 돈이니 이곳 물가로 치면 비싼 호스텔이다.
눈이 계속 오고 있긴 하지만 방에만 있을 순 없다. 오히려 눈이 오니 나가야 한다. 지난번 바쿠에서도 그렇고 눈이 내리는 예레반의 풍경을 언제 다시 볼 것인가? 예레반의 눈도 언제 맞아 보고. 그러니 더욱 나가야 한다.
12시 조금 넘어서 숙소를 나선다. 눈은 아침보다 더 많이 내리는 것 같다. 날씨가 따뜻해서 몸에 닿은 눈은 이내 물로 변한다. 옷이 젖을 것 같아 방수가 되는 아웃도어 외투로 갈아입었다.
눈 오는 날 예레반의 중심가 산책
중심가에 있는 숙소라 나가면 바로 예레반의 중심이다.
우선 어제 직원이 알려준 유심 파는 가게를 갔지만 여권이 필요하다는 말에 가격만 확인하고 나온다. 눈이 더 세게 내린다. 눈을 피할 카페를 찾고 있는데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조금 걸으니 카페가 눈에 뛴다. 깔끔한 레스토랑을 겸하는 카페다. 밖이 보이는 창가 옆에 자리를 잡고 에스프레소 더블을 시킨다. 아메리카노를 시킬까 하다가 그냥 왠지 에스프레소가 당겼다.
창가에 앉아 글을 쓰다 문득 눈을 들어 밖을 본다.
이런! 함박눈이 펑펑이다.
바쿠에서 부족했던 것을 여기서 제대로 본다. 오늘이 2월의 마지막 날인데 이렇게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다. 겨울을 피해 떠난 나의 여행에 어제, 오늘 제대로 겨울 맛을 보여준다. 지금 내 여행은 오히려 겨울을 찾아 떠나는 여행 같다.
어떻게 보면 을씨년스러울 수도 있을 터인데 눈이 오는 예레반의 거리가 내게는 무척이나 따뜻하게 다가온다.
작년 가을에 여행을 떠나서 처음 보는 눈다운 눈이다. 그래서일까 더욱 기분이 좋다. 동유럽을 닮은 것인지 아니면 러시아를 닮은 것인지, 아무튼 이국적인 거리도 참 좋다. 생각보다 중심가 거리는 깨끗하고 예쁘다.
아예 조금 더 있을 생각으로 카페에서 점심거리도 시킨다. 내리는 눈은 보기는 좋은데 맞으며 돌아다닐 생각은 안 난다. 날씨가 따뜻하다 보니 눈이 바로바로 녹아서 길도 질퍽질퍽하고, 옷도 금방 젖는다. 오늘은 이렇게 예레반의 풍경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
어느새 눈이 그쳤다. 나가보기로 한다. 바로 숙소로 가는 것은 좀 아쉬워서 예레반의 가장 상징적인 곳이라는 캐스케이드(Cascade)에 가보기로 한다. 여행기에서 예레반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나오는 곳이 캐스케이드다. 일단 뭔가 하고 가보기로 한다.
카페가 있는 Northern Ave에서 캐스케이드 방향으로 올라가면 바로 오페라 하우스 광장이 나온다. 론리 플래닛 지도에는 오페라 광장(Opera Square)으로 나오고 구글 지도에서는 자유 광장(Freedom Square)으로 나온다. 숙소에서 준 이곳 지도에는 Azatuyan Square로 나오는데 Azatuyan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오페라 하우스는 거대한 원형 건물처럼 보인다. 옆으로 지나가다 보면 가건물의 티켓 오피스가 나온다. 마침 오페라 카르멘(Carmen)을 하고 있어서 슬쩍 가장 싼 좌석의 가격을 물어보니 2000드람이란다. 2000드람. 겨우 5천 원.
오페라 하우스(Opera House)를 지나서 길을 건너면 다시 공원이 하나 나오는데 프랑스 광장(Square of France)이란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이곳 곳곳에 노천 카페들과 레스토랑들이 펼쳐지는 것 같다. 지금은 겨울이라 그런지 영업을 안 하는 듯.
캐스케이드(Cascade)
그 광장을 건너면 바로 캐스케이드가 보이는 길이 나온다. 캐스케이드 앞으로 여러 가지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거리가 나오는데, 이 거리의 이름이 타마니안 거리(Tamanyan Street)다.
이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 그러니까 캐스케이드 정면 앞으로 지도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대한 동상이 나온다. 이 동상의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이다. 동상 뒤로 펼쳐지는 캐스케이드뿐만 아니라 그 앞으로 방사형으로 펼쳐지는 예레반 시가지를 설계한 사람이라고 한다.
예레반의 도심은 캐스케이드를 중심으로 넓게 방사형을 그리고 있다.
그 방사형 구조 안으로는 격자무늬로 길이 나 있는데 모두 타마니안이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아르메니아 사람은 아니고 러시아 출신의 건축가다. 하지만 1923년부터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살면서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예레반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의 맨 앞에 동상이 세워진 것을 보면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무척이나 존경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예레반은 1828년 러시아가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예레반에 남아 있던 이슬람 잔재들-모스크 등-을 제거하면서 점진적으로 재건을 추진했다고 한다. 타마니안이 지금의 예레반을 설계한 것은 1920년대라고 한다. 타마니안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아라랏산(Mt. Ararat)을 예레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도록 도시를 설계했다고 한다.
캐스케이드는 계단식 폭포를 의미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니 진짜 현대적인 건물 식으로 만들어진 계단식 폭포다. 겨울이라 물이 흐르지는 않는데 물이 흐리면 굉장히 볼만 할 것 같다. 캐스케이드 위에 올라서면 바로 앞으로 아라랏산이 바로 손에 잡힐 듯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날이 흐려서 그런지 산은커녕 산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캐스케이드 맨 위에 올라가니 예레반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눈 덮인 시가지라 더욱 운치가 있다. 겨울이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예레반은 분지인 시내 중심을 낮은 구릉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다. 캐스케이드도 시내 북쪽의 구릉 가운데에 만들어졌다. 시내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구릉에는 마치 옛날 서울의 달동네를 보는 것처럼 집들로 뒤덮여 있다. 서울 강북을 보는 기분이다.
캐스케이드를 구경한 것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치기로 한다.
핸드폰 시계의 오류로 오페라 공연을 놓치다
숙소로 오면서 오페라 티켓 박스에 가서 오페라 카르멘 티켓을 샀다.
가장 싼 2000천 드람 티켓으로. 티켓 박스의 아주머니가 그나마 나쁘지 않은 자리로 골라주셨다. 유럽의 한 자락에서 드디어 오페라를 본다.
오페라를 보지 못했다!
어이없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오페라 시각은 저녁 7시. 시간이 많이 남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숙소에서 좀 쉬다가 한 시간 전인 오후 6시쯤 오페라 하우스를 갈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오늘 하루 종일 가방에 넣어두고 차지 않았던 손목시계도 찼다.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는 핸드폰을 꺼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손목시계를 차면서 시간을 보니 이상하다. 시계바늘이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시차가 없기 때문에 손목시계의 시각이 다를 수가 없다. 깜짝 놀라서 핸드폰 시계를 보니 핸드폰은 그대로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다. 무언가가 이상하다. 리셉션으로 가서 스텝인 안나(Anna)에게 시각을 물어보니 7시란다.
자동설정으로 해놨는데 어쩐 일진지 핸드폰 시계가 아르메니아 시각을 한 시간 늦게 설정해 놓은 것이다. 수동으로 설정하니 저녁 7시로 나온다. 이런 제길. 7시에 시작하니 아무리 가깝더라도 입장은 불가능하다. 어이없게 표를 날린다. 매일 차고 다니던 손목시계는 오늘따라 왜 차지 않았는지 원망스럽기도 하다.
이런 사고는 여행 중에 발생하는 흔한 실수 중의 하나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믿었던 핸드폰이 시스템 오류를 내듯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여행 중에 비행기나 기차를 타는 것과 같은 중요한 일에는 시간적 여유를 많이 두고 움직인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5분 거리의 오페라 하우스를 1시간 여유를 두고 움직였음에도 결국 못 들어갔다.
나와 클래식은 정녕 가까이 할 수 없는 사이인가!
By 경계넘기.
'세계 일주 여행 > 아르메니아(Armen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D+110, 아르메니아 예레반 6: 예레반(Yerevan) 의 시장들(20190304) (0) | 2020.07.30 |
---|---|
D+109, 아르메니아 예레반 5: 20세기 첫 대학살의 희생자, 아르메니아인(20190303) (0) | 2020.07.29 |
D+108, 아르메니아 예레반 4: 아르메니아의 역사에 울고, 예술에 취하고(20190302) (0) | 2020.07.24 |
D+107, 아르메니아 예레반 3: 예레반 중심가 산책 (20190301) (0) | 2020.07.23 |
D+105, 아르메니아 예레반 1: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 거쳐 아르메니아로(20190227) (0) | 2020.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