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만남은 아니 만남만 못하다
다리(大理)에서도 난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없다. 가봐야 할 곳은 예전에 이미 다 가봤다.
며칠 다리 고성(古城)을 거닐면서 실망감만 많이 쌓인다.
피천득의 ‘인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 번째 만남은 아니 만남만 못하다.” 보고 싶었던 사람을 세 번째 만나고는 예전에 가졌던 그 사랑스런 추억까지 사라졌다는 말이다. 차라리 아니 만났다면 이전의 좋은 기억이나마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회한이 담긴 구절이다.
다리에 대한 나의 솔직함 심정은 ‘두 번째 만남은 아니 만남만 못하다.’ 다리는 두 번째 만남조차 나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다리는 예전의 모습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내가 리장(丽江)을 싫어하는 바로 그 이유, 빠르게 상업화되고 유흥지화되고 있다.
소박했던 다리의 고성, 많은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아지트가 되었던 그 다리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고성 안에는 이미 시끄럽고 화려한 바와 값비싸 레스토랑, 기념품 상점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다리 고성의 반 이상이 여전히 공사 중이다. 역사의 숨결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다. 공사판의 먼지와 유흥가의 레온사인과 소음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들은 말에 의하면 한나라 시대의 거리로 만든다고 하던데 진솔한 옛 것은 사라지고 화려한 가짜만이 판을 치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예전에 가졌던 다리에 대한 그 좋은 이미지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지 않는 것. 그 추억의 장소와 지금의 장소를 비교하지 않는 것. 아울러 남아 있는 다리의 옛 모습을 찾아다니는 것.
이전에 가졌던 좋은 기억마저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두 번째 만남은 그냥 두 번째 만남으로 남기고 첫 번째 만남과의 중첩을 지운다.
형과의 메일에서 형도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전한다. 나보다 먼저 이곳 다리를 다녀갔던 형에게 다리는 첫 배낭여행의 장소 중 하나였다. 그만큼 기억이 강한 장소다.
형의 글을 그대로 옮겨 담아 본다.
거기 아침은 어떤 모습일까? 사람에게 있어서 ‘처음’, ‘첫 번째’라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른 것인가 보다. 내 처음 해외여행 중에 도시....다리!! 네 메일을 보고 나니 다리에서 모습이 또 생각난다. 그때는 1월 1일 새해를 거기서 맞이했었는데... 외국여행자들이 넓은 마당이 있는 펍에 모여서 모닥불도 피우고 밤새워 술 마시며 춤추며 대화하는.... 난 그런 게 처음이었지. 하지만 지금 만약 거길 간다면 많이 달라진 모습에 또 실망할거 같아서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은 다시 가는 게 주저 된다
좋은 생각이다.
나도 이곳에 다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다리 일반 주택가 산책
11시가 훌쩍 넘어서 숙소를 나선다. 날씨도 좋아서 어딘가를 걷고 싶다. 하지만 고성 안으로는 더 이상 가고 싶지 않다. 공사판과 유흥지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다.
숙소에서 나와서 큰 길을 따라 한 5분 정도 걸으면 삼월가(三月街)라는 거리가 나온다. 해마다 바이족(白族)의 가장 큰 축제가 열리는 거리라고 한다. 일상의 상가와 식당들이 보인다. 창산을 따라 올라가는 삼월가에는 가로로 길들이 나 있는데 이 길들의 가로수가 분홍빛의 매화였다. 마치 봄의 어느 거리처럼 예뻤다. 고성의 번거로움 따위는 없다.
올라가다가 매화꽃이 활짝 핀 어느 매화나무 아래의 작은 국수집에서 국수를 먹는다.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작은 식당이지만 손님은 꽤 있어서 돈 거슬러 줄 시간도 없다. 알아서 주고 알아서 거슬러 간다. 사장님은 계속 수타로 국수를 만드시는 데 여념이 없다.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사진으로 담지 않는다.
맛도 좋다. 특히 육수가 담백하니 좋다.
조금 더 올라가니 창산 밑을 달리는 큰 도로가 나온다. 새로 만든 도로로 보이는데 넓은 도로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도로를 건너서 주택가로 보이는 길로 들어서서 계속 올라간다. 일반 주택가의 골목길이 이어진다. 이곳의 전통 집들은 벽을 하얗게 하고 벽에 그림을 그려 놓는다.
바이족이든 한족이든 다리의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담장 위로도 다양한 꽃들이 피어 있고, 마당 안쪽으로도 다양한 꽃들과 식물들의 화분들이 많다. 그 사이사이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겨울이지만 여기는 그냥 봄이다.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피어 있기에 가을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역시 윈난성(雲南省)은 봄의 고장이다. 그런데 어느 집 담장 위로 감이 보인다. 가을인가?
계속 올라가니 창산 바로 아래로 넓은 공사장이다. 창산 바로 아래에 호텔이나 고급빌라 등을 짓는 모양이지만 대개는 땅만 파헤쳐 놓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중국 난개발의 현장이다. 고성이나 창산이나 포클레인과 시멘트가 들어가지 않는 곳은 없다.
공사장을 지나쳐 가니 창산 숲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이 보인다. 올라가 보니 바로 창산 관리소가 나온다. 등산로다. 좀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입장료가 40위안이다. 발길을 돌린다. 잠시 숲길을 산책하기에는 좀 과한 금액이다.
내려가면서 보니 마을 곳곳 시야가 트인 곳에서는 다리 고성과 얼하이의 모습이 펼쳐진다. 조금만 올라가도 이렇게 시야가 넓어지면서 멋진 풍경이 나온다. 음악을 들으며, 사진을 찍으며 골목길을 거니니 고성보다 훨씬 낫다. 다리에서 난 이런 것을 원했다.
윈난 커피
숙소 사장이 커피를 무척 잘 내린다.
커피를 주문하면 커피를 직접 갈아서 내려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20위안의 커피 가격이 조금 비싸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 그래도 방값이 15위안인데 커피가 20위안이니 자주 팔아주기는 어렵다. 자꾸 비교하게 되서.
커피를 시키려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윈난 커피가 있다. 윈난에서도 커피가 나나 보다. 나중에 사장에게 물어보니 다리에서 서남쪽으로 더 내려가는 곳, 보이차를 많이 생산하는 그곳에서 최근에는 차 대신 커피도 많이 생산하고 있단다.
최근 중국에 커피 인구가 늘어나면서 커피 재배를 늘리고 있나 보다.
사장이 정성들여 내려준 커피를 마신다.
방금 내린 커피 향이 입안에 퍼진다.
맛도 향기도 나쁘지 않다.
윈난성이 차에 이어 이제 커피의 성지도 될려나.
다리 대학
(大理大學)
오후 늦게 한국인 친구가 다리 대학에나 가자고 한다. 사장 어머니가 어제 식사하면서 다리 대학이 매우 아름답다고 했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한 30분 거리다.
대학은 교정 자체보다도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기막히다. 창산 아래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교정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펼쳐지는 전망이 장관이다. 얼하이 호수와 다리 고성 그리고 주변 마을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뒤로는 웅장한 창산이 병풍치고, 앞으로는 넓은 얼하이 호수를 담은 대학이다.
40주년 행사 기념물이 보이는데 교정의 구조가 매우 계획적인 것으로 봐서는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교정이 따로 있을 것이다. 신교정이어서 그런지 교직원들의 주택들도 빌라 식으로 세련되게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한 1, 2년 자리를 잡고 연구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나중에 숙소 사장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구교정이 따로 있단다.
대학 곳곳에서 대학생들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다. 행사가 있나 보다. 전통무용인가 보다. 우리의 전통춤과 많이 비슷하다. 무끄러미 보고 있으니 캠퍼스의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이 밀려온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학생들도 우리들을 의식하는 모양이다. 장난치던 모습이 이내 사라지고 한층 진지해진다. 모름지기 공연이란 관객이 있어야 한다.
오늘 숙소 저녁은 만두다.
사장 어머님이 직접 만드시는, 진짜 집에서 만든 만두다. 숙소 사장과 부모님이 동북 창춘(長春) 분들이기 때문에 동북 식 만두 되겠다. 부추를 넣어서 만든 부추 만두다. 맛있다. 게스트하우스 친구들과 맥주에 만두를 신나게 먹다보니 과식을 한다.
숙소가 너무 가정적이다.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하숙집 같다. 아주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이 맛있다 보니 살찌는 소리가 들린다. 한국인 친구가 다리에만 오면 이곳에 묵는 이유가 있었다.
역시나 다리는 지친 여행자가 묵어가기 좋은 곳이다. 개발만 엉망으로 하지 않는다면 여행자의 성지로 여전히 남을 터인데 더욱 아쉬워진다.
by 경계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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