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7. 30. 일. 비. "빗속의 메헤랑가르 성"
오늘도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메헤랑가르성(Meherangar Fort)을 가봐야 하는데 걱정이다. 뭐 꼭 가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드푸르에서 그나마 봐야 하는 곳인지라. 이곳도 가지 않으면 조드푸르에 4박 5일 머물면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이 된다. 진짜 숙제 같은 기분. 이곳을 가기 위해서 하루를 더 연장했으니 오늘은 기필코 가야한다.
식사를 하고 방으로 내려와서 형과 일정을 상의. 일단 비가 오더라도 오전에 메헤랑가르 성은 보러가기로 했다. 뭐 달리 방법도 없다.
10시 조금 안되어서 비가 좀 잦아드는 것을 보고 길을 나섰다. 숙소 위로 올라가면 힐뷰(Hill View) 게스트하우스 옆으로 성에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 거기서부터는 약간 급경사의 돌길. 중세 유럽의 길을 걷는 기분이다.
길을 올라가면서 보니 눈 아래로 조드푸르 구시가지가 한 눈에 보인다. 흐린 날이라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시야가 훤해진다. 그다지 시내가 블루하지는 않다. 돌계단은 다람쥐들의 놀이터. 사람을 보고도 거의 두려워하질 않는다. 사람이 지나가든 쳐다를 보든 자기 할 일 하기에 바쁘다. 인도는 동물의 천국인 듯. 채식주의자들도 많고.
성은 금세 올라왔다. 숙소에서 보면 먼 듯해 보였는데. 입구에 입장료 내는 곳이 있다. 외국인은 600루피. 외국어 가이드기가 무료로 대여된다. 그래도 600루피는 꽤 비싸 보인다. 중국에 비하면 무척이나 저렴한 것이지만, 레를 제외하고 거의 입장료를 낸 적이 없으니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생각해보면 인도는 입장료 받는 곳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레 궁전 들어갈 때 200 루피. 그리고 곰파 정상에 들어갈 때 20루피가 지금까지 낸 입장료의 전부. 그런데 오늘 한방에 600루피. 5년 정도 지난 여행자책에는 입장료가 200루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최근 엄청나게 올렸나보다.
요즘은 어디나 물가가 가파르게 오른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저렴한 물가를 자랑하던 동남아나 인도도 최근 몇 년 간 물가가 급속히 오르고 있다. 이들 나라들의 경제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가 성장하는 것은 같이 기뻐해야할 일이지만,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점도 사실이다. 이제 어디를 가야하나?
하지만 이들 나라들에서, 특히 관광지역에서 물가가 급등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은 중국인 관광객들의 급증이다. 동남아 국가들은 최근 중국 관광객이 몰리면서 물가가 급등하고 있다. 동남아 최고의 관광대국인 태국에서는 최근 거의 날마다 물가가 오른다고 할 정도다. 중국인들이 많이 오기도 하지만 그들의 돈 쓰는 방식이 다소 문제가 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졸부 근성이 있다고나 할까. 돈을 자기 과시용으로 쓰다 보니 과하게 펑펑 쓴다. 떼로 몰려 와서 펑펑 써대니 물가가 안 올라갈 수가 없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돈을 쓰면서도 욕을 먹는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돈을 쓰니 웃지만 뒤에서는 비웃는다. 우리나라 제주에서도 나타나는 현상 아닌가? 최근 사드 문제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줄어드니 제주도 여행객들은 오히려 좋아한다. 물론 현지의 관광업 관계자들은 죽상이겠지만.
메헤랑가르성은 입장료 값을 어느 정도 하는 것 같다. 성과 궁궐 자체가 모두 훌륭하다. 돌을 어떻게 그렇게 조각을 했는지 화려하다. 물론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사암 종류라 조각이 쉽긴 하겠지만, 그래도 섬세한 것은 섬세한 것이다.
성은 기본적으로 중세 유럽의 양식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닥까지 모두 돌로 되어 있는 모습이 자이살메르성과 비슷하지만, 메헤랑가르성은 그 안에 일반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성이다. 궁을 지키기 위한 성이라고 보면 된다.
성 위에서 보면 궁을 둘러싸고 있는 성 외에 멀리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보인다. 저 멀리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이 외성, 지금 내가 있는 성이 내성인 셈이다. 메헤랑가르성은 거의 수직의 돌산 위에 세워진 성이다. 성 밖으로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깊은 해자도 보인다. 지금도 물이 담겨 있다. 짓기도 힘들었겠지만 그만큼 공략도 힘들어 보인다. 자이살메르성보다 더 공략이 어려워 보인다. 이런 성은 직접 공격하기 보다는 둘러싸고 지공 즉, 누가 이기나 버티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아니면 그냥 우회를 해버리든지.
매표소를 지나 작은 문을 지나면 오른쪽 아래로 넓은 돌마당이 나오고 그 너머로 조드푸르 시가지가 보인다. 돌마당 위로는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거대한 포가 자리를 잡고 있다. 멀리 보이는 시가지에는 사이사이 파란집들이 많이 보인다. 브라만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가 보다.
그곳을 급하게 꺾어 돌아 올라오면 다시 성문이 나오고 그 안으로 거대한 성벽이 이어진다. 자이살메르성이나 메헤랑가르성이나 입구의 길이 급경사로 휘는 곳이 많은데 이는 코끼리 부대의 돌진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 경사로를 쭉 올라오면 다시 우측으로 도는 곳에 다시 성문이 나오고 그곳을 통과하면 드디어 우측으로 웅장한 궁전 건물이 나타난다. 좌측은 성벽이다. 궁전 건물까지 들어오기 위해서 4개의 성문을 통과해야 한다.
궁전과 연결하는 마지막 성문(바로 위의 세 번째 사진)을 로하 폴(Laha Pol)이라고 하는데 문 안쪽 왼쪽 벽면에는 31개의 손도장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띠(Sati)를 한 왕실 여인의 증표라고 한다. 사띠라는 것은 남편이 죽으면 살아있는 부인을 남편과 같이 화장하는 순장 풍습을 말한다. 31개의 손도장이 찍혀 있으니 31명의 왕실 여인들이 산채로 화장을 당한 셈이다. 잔인하고 아련한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도 인도 곳곳에서는 사띠가 자행되고 있다고 하니 끔찍한 일이다.
궁전은 대부분 박물관으로 개조해서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궁전 내부도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말이다. 유물은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지만, 남자라 그런지 무기들은 눈에 잘 들어온다. 갑옷이 전시되고 있는데 거의 중세 유럽의 갑옷과 비슷하다. 중국 방식이 주도적인 동아시아와는 다른 모습이다. 아무래도 이곳은 중국보다는 중동을 거쳐서 온 유럽과의 교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궁전은 대부분 돌로 조각되어 있어서 화려하다. 문살, 창살 하나까지 모두 돌로 되어져 있다. 나무는 문에나 사용되었을까? 나무보다는 돌이 구하기 쉬운 자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덕에 지금까지 궁전과 성이 이렇게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의 경우는 대부분 나무인지라 전쟁마다 모두 불타버리지 않았는가! 아쉬울 따름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우리는 실내 박물관을 구경하는 중이라 비와 상관은 없다. 박물관, 즉 궁전 맨 위층에서 밖을 내려다보는 곳이 있는데,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반대쪽의 시내 전경이 보인다. 이곳이 블루 톤의 건물이 많아서 그나마 블루 시티처럼 보인다는 곳이리라. 그렇지만 그다지 블루 블루하지 않다. 아무리 비가 내리는 흐린 날이라 하더라도 블루 시티라 말하긴 다소 어려워 보인다. 지난번 만났던 다른 한국인 여행객도 그리 블루 시티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게 맞는 것 같다.
조드푸르의 블루 시티란 별칭은 파란색으로 칠한 집들이 많아서이다. 옛날 브라만 계급들이 자신들의 집을 일반 계층과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칠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다른 계층의 사람들도 다 칠할 수 있겠지만 그다지 많이들 칠하지는 않는가 보다. 성에서 왼쪽으로, 그러니까 우리 숙소가 있는 반대편으로 블루 톤이 많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곳은 옛날 브라만들이 많이 살았던 곳, 서울로 치면 서촌이나 북촌과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성, 그러니까 궁전 위에서 바라보는 조드푸르의 전경은 훌륭하다. 특히, 성 위에 놓여 있는 포와 그 포가 내려다보고 있는 시가지의 모습이 묘한 어울림을 준다. 날씨만 좋다면 이곳도 곳곳에 멍 때리기 좋은 장소를 제공할 것 같다.
박물관을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것 같은데 비도 오고해서 그만 두었다. 성곽으로는 올라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숙소로 돌아와서 좀 쉬다가 저녁은 좀 고급스런 레스토랑에서 먹기로 했다. 팔 하벨리 성의 옥상 레스토랑인 유니크(Unique)가 전망도 좋다고 해서 갔다. 그런데 비가 계속 내려서 옥상에서 먹는 것은 그만두고, 실내로 들어가서 탄두리와 버터 치킨을 먹었다. 맛은 뭐 다 비슷한 거 같고 시설이나 서비스는 좋다. 가격 자체는 그리 비싸지 않은데 여기에 세금이 따로 18%가 붙다보니 많이 비싸진다. 이제는 닭고기도 많이 먹으니 좀 질리는 듯.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 옷가게 앞에 한글로 영화 ‘김종욱 찾기’에 나온 곳이라고 써 붙여진 종이를 봤다. 조드푸르는 영화 ‘김종욱 찾기’의 촬영무대다. 우리가 있는 골목 곳곳에서 촬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안내 문구에 의하면 영화에 출연했던 공유와 임수정이 여기서 옷을 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짐을 좀 챙기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내일은 또 다시 이동한다. 우다이푸르(Udaipur)로. 조드푸르의 마지막 밤이다.
그리 큰 기억도, 그리 큰 감흥도 없는 도시지만 오히려 그 잔잔함이 오래 기억이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좁고 좁은 구도심의 답답함 역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큰 기억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릭샤 시내 드라이브. 그리고 그 기사 아저씨의 친절.
by 경계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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