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타운 산책하기 前,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이야기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서는 1박만 하는 관계로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
숙소에서 샤워만 하고 바로 길을 나선다. 숙소에서 올드타운까지 걸어서 30분. 상쾌한 지중해 날씨와 맑은 하늘과 함께 샤워까지 하고 나니 발걸음조차 경쾌하다.
버스나 택시를 탈까 하다가 그냥 걷는다. 버스터미널 부근 숙소에서 올드타운까지 아드리아해(Adriatic Sea)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의 풍경이 너무 좋아서다. 항구로서의 두브로브니크 풍경도 멋지다. 이래저래 규모 면에서는 코토르(Kotor)를 훨씬 앞선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의 역사
두브로브니크는 달마티아(Dalmatia)의 고대 도시다.
두브로브니크는 앞서 거쳐 왔던 코토르(Kotor)와 함께 아드리아해(Adriatic Sea) 연안에 있는 해안도시다.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발칸의 서안은 예로부터 특별히 달마티아라고 불렸다. 현재는 대부분 크로아티아 영토로 남아 있다.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와 마주보고 있기에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고, 로마인들이 많이 건너가 살았다. 이들이 달마티아 해안을 따라 해안도시를 여럿 건설했다. 이들 해안도시는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기에 오랫동안 로마인과 로마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브로브니크는 로마가 건설한 도시는 아니다.
코토르만 해도 첫 기록이 기원전 16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반면에 두브로브니크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도 한참이 지난 7세기에 건설되었다. 하지만 두브로브니크 역시도 로마 후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져 있던 로마인들의 해안도시가 슬라브족의 공격으로 파괴되자 그 유민들이 이주해서 건설한 도시가 두브로브니크이기 때문이다.
두브로브니크는 동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에 있다가 1205년에서 1358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Venetian Republic)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로는 자유 국가(free state)의 지위를 얻어 1808년까지 이어졌다. 당시의 이름은 라구사(Ragusa). 1382년부터 1804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도 두브로브니크는 오스만 제국에 조공만 납부하고 자율권을 가졌다.
두브로브니크는 지중해 해상무역의 중심도시로 급성장했다.
전성기였던 15, 16세기에는 세계 각지의 배가 두브로브니크로 들어왔다. 여기에 자유 국가로서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망명을 허용한 덕분에 세계 각지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두브로브니크는 경제와 함께 문화도 번성했다고. 그래서 두브로브니크의 올드타운은 지금까지 그 어느 도시의 올드타운 이상으로 화려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7세기에 건설되었지만 지금의 두브로브니크의 올드타운은 대체로 베네치아 공화국 때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1296년의 대화재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어 다시 건설되었다고 하는데 그때가 베네치아 공화국 지배 시기이기 때문이다. 올드타운을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성의 모습도 전형적인 베네치아 양식이다.
로마의 후손에 의해 건설되고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재건되었으니 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은 코토르 올드타운과 마찬가지로 발칸 내륙과는 달리 중세 서유럽의 모습이 간직되어 있다.
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은 도시를 둘러싸고 성과 함께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아픔
천년을 훌쩍 넘는 고대 도시가 어찌 아픔이 없을 수 있겠는가마는 특별히 두브로브니크는 21세기를 목전에 둔 최근에도 전쟁의 화마에 시달렸다.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1991년에는 구(舊)소련마저 해체되자 유고슬라비아 연방(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도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에 슬로베니아(Slovenia), 크로아티아(Croatia),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세르비아(Serbia), 몬테네그로(Montenegro),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 등 발칸의 남(南)슬라브 6개 공화국이 결성해서 세운 연방 국가였다.
구소련과 동유럽 체코슬로바키아의 평화로운 해체와 달리 구유고 연방은 1991년부터 1999년까지 4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폭력적인 해체의 길을 걸었다. 독립을 추진하는 공화국들과 연방을 유지하려는 세르비아 주축의 구유고 연방군과의 전쟁이었다.
크로아티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1년 6월에서 7월 사이 단 10일 간의 짧은 전쟁을 통해 슬로베니아가 독립한 직후부터 크로아티아 역시 연방군과의 독립 전쟁에 돌입했다. 연방군이 단 10일 만에 전쟁을 종결하고 슬로베니아 독립을 승인한 이유는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세르비아가 중심인 구유고 연방에게는 세르비아계 인구가 거의 없는 슬로베니아보다는 세르비아계 인구가 많은 크로아티아가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구유고 연방군의 주된 작전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대대적인 포격이었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연방군이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상대를 빠르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 작전 지역들 중 하나가 바로 두브로브니크였다.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한 연방군의 포격은 1991년 10월 1일에 시작해서 7개월 간 지속되었다. 가장 치열한 포격은 1991년 12월 초에 있었다. 포격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올드타운도 비켜가지 않았다. 연방군의 포격으로 올드타운 건물의 56%가 피해를 입었다. 당시 포격 소식을 들은 전 세계의 학자들이 두브로브니크로 몰려들어 포격을 막기 위한 인간 방패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두브로브니크 포격은 세계문화유산의 파괴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에서도 구유고 연방군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구유고 연방이 국제 사회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았을 뿐만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식을 환기시켜 구유고 연방의 경제적,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
파괴된 두브로브니크의 올드타운은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1995년에서 1999년 사이에 대부분 복구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올드타운 곳곳에는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곳의 이야기다.
by 경계넘기.
'세계 일주 여행 > 크로아티아(Croat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D+200,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1-6: 두브로브니크 성밖 풍경 (0) | 2022.04.08 |
---|---|
D+200,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1-5: 웅장한 두브로브니크성 둘러보기 (20190602) (0) | 2022.04.08 |
D+200,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1-4: 올드타운의 골목길 산책 (20190602) (1) | 2022.02.08 |
D+200,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1-3: 올드타운의 볼거리 산책 (20190602) (0) | 2022.02.05 |
D+200,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1-1: 코토르에서 두브로브니크 가는 길 (20190602) (0) | 2022.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