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을 넘겼다!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 온 것 같다.
아침저녁 날씨가 선선하다. 하이닉스에 출근하는 자전거길이 선선하다 못해 제법 찬기가 든다. 드디어 무더운 여름을 무사히 넘겼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무더운 7월과 8월은 만근까지 했다. 노가다를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되었던 점이 덥고 습한 여름을 과연 넘길 수 있을까였다.
여름을 무척 싫어한다.
그것도 습한 한국의 여름은 더욱.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름에는 습진 등의 피부 트러블도 많이 생긴다. 습하지만 않다면 더운 날씨는 그럭저럭 버틴다. 비록 햇볕 아래에서는 뜨겁지만 그늘만 들어가도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노가다를 시작할 때 가장 고민했던 것 중 하나도 여름이었다.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시작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버텨보기로 했다. 오히려 서둘러 노가다를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적응을 한 상태에서 여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봄의 늦자락도 덥지만 습도는 높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반도체 노가다는 주로 실내 작업이 많기 때문이다. 강한 햇살을 피할 수 있다. 일단 출근을 하면 점심시간 이외에는 실내에서 나올 일이 거의 없다. 물론 창문 하나 없는 공장 실내가 더 덥고 습할 수 있다. 그런데 한여름이 되니 공장 안에 에어컨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비록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습기는 어느 정도 잡아냈다.
층마다 에어컨 성능이 조금 달랐다. 이곳 하이닉스 M15 공장 현장에서는 6층과 7층이 시원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6층 방진화 구간에서는 서늘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시원했다. 6층에서 일하는, 경력이 꽤 되는 작업자의 말을 빌면 전국에서 여름에 가장 일하기 좋은 현장이 아닐까 싶단다. 반면에 내가 여름동안 주로 일했던 5층은 그저 그런 정도. 물론 공조 시설이 아직 갖춰지지 않은 곳도 많아서 이곳에서 작업하는 경우는 햇빛만 없다 뿐이지 실외에서 작업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일단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에 땀이 난다.
그나마 유도원은 가만히 서 있는 일이 많아서 땀이 덜 나지만 직접 일하는 작업자들은 온몸에 땀이 그득하다. 케이블을 까는 포설은 주로 천장에서 작업하는 일이 많다 보니 한번 올라갔다 내려오면 바지까지 젖어 있는 친구들도 있다. 그나마 나오는 에어컨의 선선한 기운도 바닥에만 몰리고 천장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도 집에 오면 곳곳에 살이 짓물러 습진이 생겼다. 특히 발목에는 습진을 달고 살았다. 등산 양말과 발에 차는 각반이 만나는 곳은 땀이 제대로 배출되지 않아서 양말의 고무줄이 있는 곳을 따라서 습진이 매번 일었다. 양말을 갈아 신는 등의 노력을 해보았지만 한계가 있다.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 고행이다.
현장 자체도 넓지만 현장에서 식당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다. 작업장에서 식당까지 왕복 40여분의 그늘 하나 없는 거리를 생으로 걸어가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식당 입구에서 10~15분은 기본으로 땡볕에서 줄을 서야 하니 이게 환장할 일이다. 식당 안의 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 안에 에어컨이 있긴 하지만 한여름 무더위에 별의미가 없다. 밥을 먹다 보면 땀이 밥 위로 뚝뚝 떨어진다. 망할 놈의 식당 사장은 돈독만 올라서 에어컨 같은 것은 별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점심 식대를 돈이나 식권으로 지급해준다면 결코 점심 먹으러 가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놈의 하청 회사는 악착같이 식당에서 직접 사인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긴 혼자 사는 나에게 이 점심이 그나마 제대로 된 한 끼 식사이긴 하다.
가장 힘든 점은 시원하게 쉴 곳이 없다.
원청인 SK에코플랜트에서는 나름 쉴 곳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다. 수천 명의 근로자들이 동시에 쉬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점심 식사 뒤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지만 시원하게 쉴 자리는 없다. 그나마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은 이미 점심을 포기한 근로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곳 반도체 공장의 진정한 짬밥 또는 경력은 점심 먹고 어디서 편히 쉴 수 있는지를 아는 능력에서 나온다.
점심시간이라도 분산하면 어떨까 싶지만 어림없다.
우리 포설팀은 처음에 점심시간을 조금 탄력적으로 운영했다. 원래 우리가 소속한 하청회사의 점심시간은 11:30~13:00까지 1시간 30분이고, 오전에 30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 포설의 경우는 일의 성격상 중간에 쉬는 게 쉽지 않아서 오전에 쉬지 않고 일하고 대신 점심시간에 오전 쉬는 시간 30분을 더해서 2시간 점심시간을 가졌다. 여기에 쉬는 시간을 13:00 뒤로 붙여서 11:30~13:30까지를 점심시간으로 했다. 덕분에 현장에서 조금 늦게 식당에 가게 되어 사람들이 빠질 때 점심을 하고 사람이 빠질 때 휴식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마저 SK에서 걸고 넘어졌다. 자기들 공식 점심시간은 11:00~13:00까지기 때문에 13:00 이후에 현장에 들어오는 근로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망할!
획일적으로 시간을 운영할 생각이면 충분한 휴식 공간을 마련하던지.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지만 직접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아니 날 수가 없다.
by 경계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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