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6. 25. 일. 맑음. "라다크 레 5: 여행 짐의 무게"
이번 여행에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고 있다. 평상시엔 늦잠을 잘도 자건만 여행할 때에는 늦잠이 없다. 아침에 눈만 뜨면 바로 일어난다. 신기하다.
오늘도 변함없이 일찍 일어났다. 간단히 세수하고 다시 짐을 싼다. 오전 9시쯤 두 번째 숙소인 스폰보(SPONBO)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어제는 짐 없이 레 시가지까지 걸어갔지만 이번에는 배낭을 메고 가는 것이라 조금 걱정을 했는데 큰 무리가 없다. 아침 공기의 상쾌함과 높다란 미루나무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파란 아침 하늘이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이래서 배낭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든 이제 정말 고산에 적응했다는 안도감이 다가온다. 물론 그렇다고 뛰어다녀도 된다는 것은 아니고.
스폰보 게하에서 레 시내로 가는 중간에 있는 레의 옛 마을은 숨은 진주다. 뭐라고 할까 옛 라타크 레 마을의 모습이 그래도 살아있다고 할까? 라다크 전통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굽이굽이 긴 좁은 골목을 만들고 있다. 그 안에 하얀 건물의 사원도 있고 제법 큰 탑들도 있다. 다와(Dawa) 게하에서 레 시내만 돌아볼 때에는 이런 마을이 근처에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었다. 다와 게하 바로 위에 있는데도 숨어 있는 듯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나 오후 늦은 시간에 카메라 하나 들고 돌아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레 시내만 봤을 때에는 실망이 컸었는데 시내 근처에 이렇게 오래된 마을이 살아 있었다.
배낭을 메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큰 차이가 없다. 30분 정도 걸었더니 올뷰(All View) 게하 근처에 우리가 잡아두었던 게하에 도착했다. 일단 가방을 두고 올뷰에 가봤다. 들어가자마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얼른 배낭 가지고 오란다. 올뷰에 방이 나왔다고. 한국인에게 인기가 있는 숙소인지라 이곳은 대부분의 투숙객이 한국인이다, 이점이 때론 좋을 수도 있지만 때론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방 가격이 550루피로 성수기에도 동일하다. 듣자니 레의 많은 숙소들도 성수기에 가까워질수록 방 가격을 많이들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올뷰는 예약 시스템이 없어서 일단 투숙한 사람은 일정에 상관없이 계속 투숙할 수가 있다. 언제까지 있겠다는 말없이도 체크아웃을 하지 않는 한 계속 지낼 수 있다. 물론 이 방식이 현재 올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편할지 모르지만 새로운 사람이 올뷰에서 방을 구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언제 방이 나올지 주인도 모르는 것이니까.
성수기에 접어들면서 다른 게하들이 가격을 계속 올리고 방을 구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옮기기로 했다. 방이 나오긴 하는데 오후에 나온다고 해서 짐을 맡겨두고 오전 11시에 점심을 먹으로 나왔다. 창스파 길에 있는 차이니스 볼(Chinese Bowl)에서 티베트 음식을 먹었다. 이곳도 여행자 책에 나오는 곳이다. 가격도 싸고 맛도 어제 간 찹스틱(Chopsticks)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너무 지저분하다. 뭐, 인도에서 청결이라는 것은 개나 줘 버리라고 하긴 하던데. 그래도 여긴 라다크 레 아닌가.
점심을 먹고 메인 바자르에서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누브라 밸리(Nubra Valley) 가는 올뷰 멤버들을 만났다. 그네들 것까지 사서 같이 먹으며 올뷰로 돌아왔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덥다.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은 뜨겁다 못해 따갑다.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지만. 방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정원에 앉아 있는데 무료하다.
레의 날씨는 내가 원했던 그런 날씨다. 한여름, 한국을 포함한 다른 지역은 슬슬 덥고 습해지겠지만 이곳은 태양의 직사광선만 피한다면 시원하다. 해발 3,500m의 고지에다 건조한 지역이라 덥지 않고 습기도 전혀 없어서다. 아침저녁으론 아직까지 쌀쌀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지역이라 항상 맑고 푸르른 하늘을 볼 수 있다. 하늘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정말 피서를 왔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오후 1시에 드디어 방이 나왔다. 그런데 생각만큼 그리 좋지는 않다. 가구도, 바닥도, 벽도 낡았다. 화장실 정도 깔끔하다고 할까. 하드웨어보다는 친절 등의 소프트웨어가 좋아서 한국 배낭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나 보다. 잠시 정리를 하고 바로 낮잠 모드로. 세 번째 숙소 만에 레에 진짜 베이스캠프를 마련한 셈이다. 레에 한 달 이상 있을 생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숙소는 중요하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여행기를 정리했다. 수첩에 기록해두었다가 한국에 돌아가서 여행기를 정리하려니 그 자체로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행 중에 정리할 생각으로 태블릿과 블루투스 키보드를 가지고 왔다. 국내여행 할 때 사용해 보니 무게도 많이 나가지 않고 해서 좋았다. 노트북은 무거워서 싫다. 그걸 들고 다닐 바에야 그냥 돌아가서 정리하는 게 낫다. DSLR도 그 무게 때문에 가끔씩 망설여지는 판에 말이다. 지금까지는 태블릿이 아니라 핸드폰을 이용했다. 핸드폰에 클라우드와 연동되는 노트앱을 깔아두면 클라우드에도 기록이 되어서 좋다. 태블릿이나 데스크탑 등 다른 기기에서도 불러내서 바로 쓸 수 있다. 이번에 태블릿을 가져온 이유는 내 핸드폰의 블루투스가 가끔 이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여행 오기 직전에 As를 받긴 했지만 불안해서 태블릿을 사용하기로 했다. 태블릿을 무게를 생각하면 이것도 큰맘을 먹은 거다.
그래도 항상 수첩을 가지고 다닌다. 돌아다닐 때는 전자기기에 기록할 수가 없어서 일단 수첩에 기록해 두었다가 숙소나 카페 등에서 틈틈이 전자기기에 정리해 둔다. 일기 쓰듯이 그때그때 글을 쓰다보면 여행의 의미를 더욱 새롭고 진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오늘같이 무료한 때에는 시간 때우기로도 나쁘지 않고. 그러다 보니 내 여행 중에 수첩과 볼펜은 나와 거의 붙어 다닌다. 가장 쉽게 꺼낼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은 물론이다. 요금, 시간 등의 팩트는 바로바로 수첩에 기록해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기억에서 사라진다. 참, 사진도 있다. 수첩과 사진기, 그게 나의 여행에 항상 동반하는 친구다. 어디를 가든 이 두 개는 반드시 챙긴다.
수첩과 함께 사진기를 항상 휴대하다보니 불편한 점이 있다. 그건 일명 똑딱이라고 부르는 일반 사진기를 DSLR로 바꾸면서 생겼다. 일반 사진기는 작고 무게도 가벼워서 휴대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는데 DSLR은 그 자체의 무게만도 600g이 넘는다. 거기에 망원줌렌즈를 하나 끼우면 1kg이 훌쩍 넘는다. 보조 렌즈 하나도 휴대해야 하고. 게다가 부피도 장난이 아니라 잠깐 나가는 경우에도 작은 배낭 하나를 꼭 메어야 한다. 하루 종일 카메라를 들고 다닐라 치면 그 무게에 내가 지친다. 그러다 보니 자꾸 DSLR은 밀쳐 두고 그냥 핸드폰만 가지고 나가는 경우가 많아진다. 요즘은 핸드폰이 웬만한 똑딱이 이상이니까.
이게 DSLR의 딜레마다. 사진은 분명 DSLR이 더 낫겠지만 여행에 있어서는 그 휴대성에 문제가 많다. DSLR, 렌즈 및 그와 관련된 기구들만 빼면 내 배낭 부피와 무게가 확 줄어든다. 게다가 내 배낭에 가격이 나가는 것은 DSLR과 렌즈뿐이다. 그것 때문에 배낭 관리에 신경이 쓰인다. 여행자에게 값나가는 물건은 또 하나의 짐일 뿐이다. 적어도 내 경우는. 노트북을 절대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래서 미러리스로 갈아타는 것을 고민 중이다. 사둔 렌즈를 호환할 수 없다는 것이 걸리긴 하지만, 사진이 주된 목적이 아닌 이상 사진기가 자유로운 여행을 제한하는 것은 피해야할 것 같다.
여행은 자유로워야 한다. 이 원칙에서 배낭의 무게도 예외일 수 없다. 짐이 가벼워야 어디든 갈 엄두가 난다. 짐이 많으면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이 올 수밖에 없다. 긴 시간의 여행인 경우 그게 결코 작지가 않다. 서양여행객들이 거대한 배낭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다. 난 분명이 반대다. 여행 전에 내가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 중에 하나가 짐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현지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현지에서 구입하고, 같은 물건이라도 최대한 재질이 가벼운 것을 택한다. 그리고 같은 것이라면 가격이 싸고, 낡은 것을 선택한다. 잃어버려도, 때론 현지에서 버려도 될 만한 것으로.
그러다 보면 많은 겨우 패션은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반면에 패션을 포기하니 생기는 좋은 점도 있다. 거의 반 거지꼴을 하고 다니다 보니 도둑맞는 경우는 거의 없고, 가격을 깎기에도 좋다. 항상 도적의 표적은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있어 보이는 사람이니까. 없어 보여야 물건 값도 잘 깎아 준다.
물론 때로 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 백화점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난처한 경우도 생긴다. 재작년 라오스 여행을 할 때다. 라오스 중부의 사완나켓(Savannakhet)이라는 곳에서 숙소를 못 구해서 본의 아니게 고급호텔에 묵어야 할 때였다. 배낭을 메고 호텔에 들어가려는 것을 정문 입구에 있는 경비원이 막는 것이 아닌가! 거의 거지로 본 거지. 우리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진국일수록 경비원들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 도난을 방지하려는 이유이겠지만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이런 경우에도 외국인들은 거의 통제하지 않는데도 나는 통제를 받았다. 어쩔 수 있나 그냥 밀고 들어갔다.
유럽도 좀 문제다. 이 친구들은 그렇지 않아도 인종차별이 강한데 거기다가 없어 보이게 입고 다니면 무지하게 무시한다. 입으로는 사랑과 평화 그리고 인권을 외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인간들인지라 있어보여야 그나마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에 유럽여행의 딜레마가 있다. 유럽에 도둑이 적은가? 아니다. 도둑이나 소매치기들은 세계에서 유럽이 가장 많아 보인다. 특히 이탈리아나 벨기에는 악명이 높다. 없이 다니자니 무시당하고, 있어 보이자니 뻑치기를 걱정해야 한다. 여행하기 딱 싫은 동네다. 그래선지 내 첫 해외 여행지가 호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서구권은 출장으로나 가지 내 여행지 리스트에서는 항상 맨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서구에 대한 환상은 호주 7개월 있으면서 진즉 개에게나 줘 버렸다. 개에게는 미안하지만.
오후 5시 반쯤 되어서 저녁 먹으러 형과 송 선배와 나갔다. 이번에도 네팔 음식이다. 요즘 활동량이 적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질 않는다. 덕분에 음식이 맛있는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하고 나서 메인 바자르에 있는 슈퍼에 들렸다. 내일 누브라 밸리에 갈 간단한 준비물을 샀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짐도 대충 정리했다.
오늘까지 숙소만 세 번째다. 가방을 세 번 풀었다 쌌다 했다는 거다. 내일 다시 누브라 밸리(Nubra Valley)를 향해 떠나니 5일 만에 네 번을 이사하는 셈. 그러다 보니 레에 온지 4일째인데도 불구하고 레도 제대로 둘러보질 못했다. 물론 고산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런 점도 있고, 형의 페이스에 맞추다 보니 그런 점도 있지만, 오늘의 경우만 보더라도 방을 구하고 옮기느라 하루해를 거의 다 보냈다. 안정적인 베이스캠프를 확보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누브라 밸리를 일주일 정도 다녀오는 동안에 올뷰에 방값을 지불하면서 방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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