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7. 2. 일. 맑음. "라다크 레 12-1: 레 왕궁에 서서"
새벽 6시에 형과 창스파(Changspa) 거리를 산책했다. 여기가 진짜 여행자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게스트하우스와 카페, 식당이 줄줄이 있다.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연 가게도, 돌아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적막하다. 하지만 곧 가게들도 모두 문을 열면서 여행객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창스파 끝 무렵에서 라이스볼(RiceBowl) 식당을 봤다. 외부에 써진 메뉴판에 한국음식도 있다. 백숙이 싸고 맛있는 집이라고 들었는데 꽤 우리 숙소에서 꽤 멀다.
거리의 마지막 끝에 있는 샨티 스튜파(Shanti Stupa) 입구까지 갔다. 진짜 입구까지만 갔다. 샨티 스튜파는 여기서 무수히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오늘은 올라가고 싶지 않다. 아침 운동 삼아 올라가는 여행객들을 따라 잠시 올라갔다가 이내 내려왔다. 조금 올라왔는데도 내려다보는 레의 전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는다. 레에 와서는 커피를 더 많이 마시는 것 같다. 형도 커피를 좋아하긴 하는데 그 보다는 같이 누브라 밸리(Nubra Valley)를 갔던 여성 동지들께서 커피를 좋아한다. 그 사람들 좋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여기서 커피 끊이는 것이 좀 귀찮다. 커피보드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공용 부엌에서 가스불로 커피물을 끊여야 하고, 마시고 나면 컵도 설거지를 해서 가져다 놔야 하고. 덕분에 커피 한 잔 하고 설거지는 열심히 한다.
아침을 먹고 9시쯤 본격적으로 레를 둘러보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레에 와서는 지금까지 근처 동네만 돌아다녔지 레 자체를 제대로 찾아보지는 않았다. 일단 오늘은 레에서 가장 중요한 레 왕궁(Leh Palace)과 남걀 체모 곰파(Namgyal Tsemo Gompa, 이하 남걀 곰파)를 보기로 했다. 형은 어제 술을 조금 마시고 다시 고산증이 도졌다. 이번에도 제대로 걸린 모양이다.
레 왕궁과 남걀 곰파는 레 시내 어디에서도 보인다. 레의 중심인 메인 바자르(Main Bazaar) 바로 위,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길은 정확히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올뷰 게스트하우스에서 출발해서 전통 이슬람 빵가게 골목을 지나 메인 바자르에 들어가기 직전, 과일가게 골목으로 좌회전해서 구시가지 골목을 쭉 따라 가니 레 왕궁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좁은 골목과 굴다리 같은 곳을 지나니 급경사의 계단이 나오고 그 위에 왕궁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정표가 없으면 찾기가 싶지 않다.
계단 바로 밑에 서면 경사면 위에 세워진 레 왕궁이 보인다. 자못 웅장하다. 왕궁 바로 아래 허물어진 구시가지의 건물들과 그 위에 서 있는 레 왕궁을 보고 있자니 역사의 허망함과 애잔함이 밀려온다.
레 왕궁 입구에서 레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경사를 오를 때 마다 넓어지는 시야가 색다르다. 누런 황토 빛깔의 구시가지와 밝은 페인트색의 신시가지가 메인 바자르를 경계로 묘하게 대비되면서 레의 현재를 보여준다. 아래 세 번째 사진에서 멀리 하얀 돔이 있는 건물을 끼고 대각선으로 길게 보이는 틈새가 메인 바자르다. 레의 중심. 네 번째 사진은 그것을 조금 글로즈업 한 사진이다.
레 왕궁은 입장료가 200루피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입장료를 내 본다. 다소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왕궁은 모두 9층으로 되어 있다.
레 왕궁은 라다크의 옛 왕국이었던 레 왕국의 궁전이다. 17세기인 1630년에 레의 왕이었던 셍게 남걀(Sengge Namgyal)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19세기 레 왕국이 멸망하면서 레 왕궁도 폐가로 변했다. 많이 복원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공사 중이다. 건물은 모두 흙과 나무로 되어 있다. 나무 기둥의 목각 조각은 나름 섬세하지만 화려하기 보다는 소박하다.
안에는 사원으로 보이는 방도 있다. 달라미 라마의 초상화도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8층에 변소가 있다는 것. 근래에 만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좁은 방에 변기가 하나 있고 그 앞으로 창문이 있어서 레 전경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옛날 이곳에 사시던 분들께서 애용하던 전망 좋은 화장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은 입구에 이름판도 없어서 뭔가 하고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요새도 관리인분들이 사용하고 계시는지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부에는 크게 볼거리는 없다. 여전히 내부는 복원 중이다. 충분히 입장료가 아까울 수 있다.
반면에 외부는 거의 정비가 끝난 것 같다. 궁의 외벽은 돌로 쌓은 다음 흙으로 바른 것으로 보인다. 나무와 흙벽으로 이루어진 궁 외곽은 검소하면서도 간결한 아름다움이 있다. 황량한 주변 산들과도 조화를 이룬다.
왕궁은 소박하지만 층층마다 올라가면서 내려다보이는 레 시가지와 주위의 풍광은 훌륭하다.
맨 위 옥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레는 좌측, 즉 동쪽으로부터 마르고 황량한 지역에 구시가지가 시작되면서 남쪽 중앙으로는 도심지를 이루고 우측, 즉 서쪽으로는 신시가지가 형성되고 그 뒤로 녹지가 펼쳐져 있다. 동쪽에서 남쪽 시 중심지까지 주거지가 밀집해 있고,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산재되어 있다. 갈색과 녹색이 시 중심을 경계로 뚜렷이 구분되면서 도시를 이룬다.
게스트하우스나 호텔들은 남서쪽, 즉 시 중심가에서 서쪽의 신시가지와 녹지에 주로 포진해 있고, 그 위로는 농사짓는 분들이 주로 산다. 동남쪽의 주거지에는 일반 도시주민들이 사는 것으로 보인다.
황량한 산 그리고 그 뒤로 설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레는 확실히 분지 도시다. 여기서 이렇게 보고 있자니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尔自治區)의 국경도시 타슈쿠르간(Tashkurgan)이 생각난다.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파미르 고원 한 가운데 있는 타슈쿠르간 역시 해발 3,600m의 고지에 있다. 해발 3,520m의 레와 거의 비슷한 높이다. 그곳에서 석두성(石头城)이라는 허물어진 성 위에서 타슈쿠르간을 둘러보았을 때와 그 전경이 너무도 흡사하다. 설산에 둘러싸여 있는 좁은 분지의 도시. 황량함 속의 녹지. 오하시스 도시. 그리고 지금은 몰락한 그 옛날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두 도시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면서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려진다.
참, 타슈쿠르간은 중국과 파키스탄 접경에 있다. 이곳에서 카람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를 타고 조금만 가면 바로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소가 있는 고개인 쿤자랍 패스(Khunjerab Pass)가 나온다. 해발 4,693m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국경소다. 여기를 넘어가면 파키스탄의 훈자(Hunza)가 나온다. 누브라 밸리의 마을 투르툭(Turtuk)을 닮은 곳이다.
레 왕궁 옥상에서 뒤, 그러니까 북쪽을 바라보면 산 정상에 있는 남걀 사원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남걀 사원의 전망도 훌륭하다.
더 높은 곳에 남걀 곰파가 있으니 풍광만을 위해서라면 굳이 비싼 입장료를 내고 왕궁에 들어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왕궁 자체에 관심이 있는 여행객들이라면 모를까.
현재를 사는 우리야 이렇게 소박한 궁전을 보면 당장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하지만 모름지기 예나 지금이나 정치지도자들이 사는 곳은 이래야 한다. 화려할수록 웅장할수록 당시 그것을 만들었던 민초들의 피와 눈물은 얼마나 컸겠는가. 소박하고 작을수록 백성을 사랑하고 정치를 잘하는 성군(聖君)이며 아름답고 숭고한 인본(人本)의 전통을 가진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유적으로 관광수입을 짭짤하게 올리는 나라들을 보고 조상들의 피눈물로 후손들이 먹고 산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12-1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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