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6. 30. 금. 비 그리고 눈. "라다크 레 10: 비, 그리고 눈 속의 라다크"
새벽 4시 반쯤 일어나서 짐을 최종 확인하면서 떠날 준비를 했다. 아직 주변은 캄캄하다. 여전히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제법 내린다. 그제 저녁부터 계속 비다. 건조지역인 라다크에서는 거의 장마와 다름이 없다. 이상기후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금은 여름, 극단의 건조시기이다. 모두들 짐이 젖지 않도록 배낭커버를 단단히 챙겼다.
원래 가려는 날짜보다 이틀 정도 앞당긴 이유는 날씨 때문이다. 비가 계속 내리면 이곳에 고립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차가 운행된다고 하더라도 극도로 열악한 도로 사정상 산사태, 지반붕괴 등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만큼 도로 사정은 좋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연 3일 내린 비로 오늘도 장담을 못하겠다.
우리가 일찍 출발한다고 사라가 아침을 일찍 준비해주었다. 고맙다. 일단 아랫마을에 내려가서 쉐어 택시(share taxi)를 확인해보고 없으면 로컬버스를 타기로 했다. 지난번 보니 로컬버스가 새벽 6시에 출발했다. 새벽부터 서두를 수밖에 없다. 올 때 여유부리다가 고생하지 않았나!
5시 30분 빗속에 우리 일행은 숙소를 떠났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거치진 않았다. 제법 비도 계속 내리고. 짜이 파는 곳이 쉐어 택시를 타는 곳이라 일단 그곳으로 갔는데 택시가 없다. 차가 없는 것인지 도로 사정으로 운행을 안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로컬 버스를 이용해서 디스킷(Diskit)으로 갈 수밖에 없다. 로컬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다리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비가 더 거세진다. 버스 정류장에는 비 피할 곳도 없다. 그곳에는 이미 러시아 처자 한 명과 중년의 백인 남성 둘, 그리고 현지인들 몇 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를 쫄쫄 맞으며.
그때, 어제 friend's cafe에서 만났던, 투어로 온 한국인 젊은 친구들의 차가 지나갔다. 그 친구들 말이 한 20분 정도 전에 나갔다가 길이 막혀서 다시 돌아와서 숙소를 구하는 중이란다. 비가 계속 와서 도로 곳곳에 산사태가 난 모양이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우리도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하나?
버스 정류장에 여행객들만 있었다면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이미 비도 맞을 때로 맞았다. 그런데 현지 분들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로 사정으로 버스가 중단되었다면 이분들은 알고 있을 가능성 높다. 빗속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버스가 다닌다는 것이리라. 우리도 기다려 보기로 했다.
6시 정시에 로컬 버스가 왔다. 얼른 탔다. 다행히 자리가 있다. 디스킷까지는 1인당 100루피. 싸다. 현지 도로 사정을 가장 잘 아는 로컬 버스가 운행한다는 사실은 현재 도로 사정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참 가고 있는데 아까 되돌아와서 숙소를 다시 찾고 있다던 한국 친구들 승합차가 우리를 추월해 간다. 아마 버스가 가는 것을 보고 쫓아 왔나 보다.
다시 한참을 가는데 저 앞에 우리를 추월했던 그 승합차가 길 위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버스도 섰다. 운전수와 차장이 차에서 내려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차에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도 나가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나섰다. 걸어가 보니 앞쪽에 작은 산사태가 났다. 돌과 흙이 빗물과 함께 흘러 내려와서 뻘밭을 이루고 있었다. 흘러내린 흙더미가 좀 깊어서 차가 잘못하면 빠질 수가 있을 것 같다. 한 30분 정도를 서 있었다. 군부대에서 사람들이 와서 보수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우리 버스 뒤에 서 있던 작은 승용차가 냅다 뻘 속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잠시 뻘 속에 서는가 싶었는데 몇 명이 미니까 금세 뻘을 벗어났다. 이를 보고 한국 친구들이 타고 있던 SUV 승합차도 한 번에 달려 나가고 우리 버스도 승객들을 모두 내리게 한 다음에 지나갔다. 근데 문제는 버스에서 내린 우리다. 그 뻘밭을 걸어가야 하는 것. 다행히 산 쪽으로 돌들이 쓸려내려온 곳을 주로 밟으며 걸어왔다. 조금 빠지긴 했지만. 산사태도 보고 재미있는 경험이다. 제일 작은 승용차 운전자의 용기 덕에 그나마 일찍 그곳을 떠났다.
길이 험하긴 험하다. 그냥 보고 있어도 돌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곳이 곳곳에 있으니 이 정도 비에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전혀 이상스럽지가 않다. 이후에도 곳곳에 낙석이 떨어진 곳이 있었다. 그때마다 차장이 내려서 돌을 치우면서 갔다. 이곳에서 차장의 역할은 단순히 요금 걷는 것만이 아니다.
버스는 마을마다 서서 승객들을 태웠다. 이미 버스 안은 만원이다. 대형버스가 아니라 25인승 정도의 미니버스라 좁아서 옴짝달싹하기도 힘들다. 디스킷에 가까워지면서는 더 많은 승객들이 탄다. 아기를 안은 아주머니가 타니까 형이 아기를 대신 앉는다. 덕분에 형의 배낭은 내 차지다. 형 무릎에 앉은 아기가 울지도 않는다. 투르툭(Turtuk)이 중간 마을이었다면 우리도 서서 왔을 것이다.
10시 5분에 디스킷에 도착했다. 30분 정도 산사태로 정차한 것을 제한다면 거의 3시간 반 만에 도착한 것이다. 택시와 크게 차이가 없다. 버스로는 디스킷에서 투르툭까지 대여섯 시간 걸린다고 들은 것 같은데 개뻥이다. 비만 안 왔다면 세 시간에도 충분히 올 것 같다. 역시 직접 발로 다녀봐야 한다. 그런데 그런 정보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여행사에서 퍼트렸을까?
버스 내린 곳이 일종의 터미널이라 그곳에 쉐어 택시 승합장도 있었다. 쉐어 택시 사무실 같은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레 가는 택시를 구했다. 처음에는 8명이 되어야 한다며 2명을 더 구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8명 가격인 3,200루피를 낸다고 했더니 바로 OK다. 11시에 출발한다고 해서 지난번 식사했던 그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비가 내리는 것 빼면 나름 일정이 잘 맞는다. 이번에는 바로 레에 갈 수 있으니 말이다.
11시 5분에 레를 향해서 출발했다. 비는 더 거세지기 시작하고 고도를 높일수록 구름이 안개로 변해서 시야를 막는다.
5,606m의 까르둥 라(Kardung La)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올해 첫눈을 까르둥 라에서 맞는다. 이 건조한 곳에서 비도 보고 눈도 보고 참 진기한 경험이다. 여행책에서 레에서 비가 오면 까르둥 라에서는 눈이 내린다는 내용을 읽긴 했는데 내가 그걸 경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길에 눈이 쌓여서 차들이 곳곳에서 정체되기 시작했다. 까르둥 라 직전에서는 내려오던 차가 올라오는 우리 차에게 길을 비켜주다가 눈에 묻혀서 헛바퀴를 돌기 시작했다. 우리 차 바로 앞이라 남자들이 모두 내려서 앞차를 밀었다. 까르둥 라 바로 직전이니 거의 높이가 5,600m. 이 고지에서 차를 밀고 있다. 고산인지라 그것 조금 힘을 썼다고 숨이 엄청 찬다. 약간 어지럽기도 하고. 잊고 있었던 고산증의 두려움이 다시 엄습해온다.
오후 2시에 까르둥 라 정상에 정차했다. 갈 때는 내리지 못했던 터라 이번에는 내려서 기념사진도 찍고 겸사겸사 화장실도 갔다. 정상 부분은 차량과 인파로 인해서 내린 눈이 녹아서 질퍽질퍽. 고산에 더해 걷는 것도 힘들었다. 숨도 많이 차고 확실히 다르다. 레하고도.
고개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무엇이 구름이고, 무엇이 안개고, 무엇이 산 위에 쌓인 눈인지 모르겠다.
내려오는 길이 문제였다. 까르둥 라를 넘어서자마자 차가 정체되면서 한 시간 이상을 가다서다만 반복했다. 아니 거의 그냥 길에 서 있었다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모두들 여기서 고산증이 오기 시작했다. 신양은 머리 아프고 배 아프다고 난리다. 형도, 송 선배도 머리가 꽤 아픈 모양이다. 팔팔하던 장양도 힘이 드나 보다. 나는 약간의 편두통은 있었지만 그다지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할까. 올라올 때까지 포함하면 이래저래 거의 두 시간 가까이 5000m 고지에 있으니 무리도 아니다. 고산도 고산이지만 계속 매연 냄새를 맡고 있자니 그것이 더욱 고산증을 심하게 하는 것 같다. 이곳 차량들은 아직 매연에 대한 단속이 심하지 않아서 그런지 매연이 장난 아니다. 그 냄새를 맡으며 계속 있자니 나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까르둥 라에서 조금 내려오니 눈길이 사라지면서 정체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레에도 비가 많이 왔는지 길이 좋지 않아서 마냥 속도를 내지는 못했다.
오후 4시 50분. 드디어 레에 도착했다. 숙소 근처까지는 갈 수 없다고 해서 쉐어 택시 정류장인 폴로 경기장 근처에서 숙소까지 걸어 왔다. 레에도 비가 심하게 왔는지 오는 길이 물바다다. 흙길에 물이 고여서 건너가기가 힘든 곳도 많았다. 숙소에 와서 들어보니 우리가 누브라 밸리로 떠난 월요일 저녁부터 오늘 오전까지 레에 비가 계속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우리의 누브라 밸리 일정이 최고의 선택이 된 셈이다. 하루라도 늦었으면 누브라 밸리에는 가지도 못하고 레 숙소에서 내내 비만 보고 있을 뻔했다. 숙소 사장님도 기상이변이란다. 일주일 가까이 계속 비가 내리다니. 장마다. 이러다 보면 라다크도 모두 녹색의 초지로 바뀌는 것 아닐까?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여행책에서는 극강의 건조함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막상 와보니 습기 해결하는 것이 문제다.
형과 송 선배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침대 행. 형은 레에 처음 오자마자 고산증으로 고생했는데 이번에도 고산증이 왔나 보다. 까르둥 라에서의 정체가 원인이리라. 갈 때에는 정체 없이 바로 넘어가서 별 문제가 없었으니까.
방에서 쉬고 있는데 신양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왔다. 형과 송 선배는 뻗어서 갈 수 없고 우리끼리라도 가서 저녁 먹고 빵이나 사다 주잔다. 장양, 신양, 박군 그리고 나는 저녁을 먹으러 한국 식당인 아미가(Amiga)에 갔다. 나는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다른 사람들 다 먹은 다음에야 나오고 그것도 끓이다 만 것처럼 나왔다. 맛, 당연히 없지! 아미가는 된장찌개만 괜찮은 듯. 나머지는 그저 그렇고. 반찬은 괜찮다. 다만 가격이 다소 비싸다. 식사를 마치고 형과 송 선배 먹을 빵과 음료수를 사서 돌아왔다.
나도 약간의 두통과 피곤을 느껴서 돌아오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다. 5,000m 대 고지의 위력을 느낀 하루였다. 그래도 건조한 라다크 지역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린 비와 첫눈의 경험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누브라 밸리, 특히 투르툭에 좀 더 있지 못한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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