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7. 12. 수. 비. "레의 골목길"
쉬는 기간이다. 초 모리리(Tso Moriri)의 영향으로 피폐해진 육신과 영혼을 위해서 당분간은 쉬어야 한다. 어디를 움직이고, 아니 어디를 가기위해 차를 타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멀미가 나려 한다. 이럴 때는 쉬어주어야 한다. 쉬어야 할 시간이고, 쉬어 주어야만 할 시간이다.
그래도 그렇지. 날씨가 영 이상하다. 아침은 그럭저럭 흐리더니만 빨래를 하고 널려고 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결코 쉽게 그칠 비는 아니라는 뜻. 어찌 보면 쉬라는 하늘의 계시다. 하늘이 흐리고 가끔씩 비를 뿌리니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고, 방에서 책이나 보면서 쉴 수밖에 없다.
초 모리리에서의 고산증으로 달아난 입맛이 슬슬 살아나고 있다. 아침에는 항상 가는 히든 노스(Hidden North) 카페에 가서 그 양 많은 아침 세트를 시켜서 다 먹었다. 인도 특유의 향이 나는 현지 음식은 아직 어렵지만 익숙한 음식은 이제 거뜬히 먹어 치우고 있다.
저녁에는 질퍽질퍽한 창스파(Changspa) 거리의 그 진흙탕 길을 헤치고 라이스 볼(Rice Bowl)에 가서 또 백숙을 먹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확실해졌다. 내가 백숙에 물렸다는 것을. 그리고 이 동네 한식집의 김치는 왜 이리 매운지 그냥 매운 정도가 아니라 속이 쓰려올 정도다. 고추가 무척이나 매운가 보다.
오다가다 비를 맞는다.
레에 와서 비도 맞고 눈도 맞아 본다. 참 신기하게 말이다.
이 극강의 건조 지역에서 한여름에 별걸 다 경험한다. 정말 이상기후인가?
황폐해진 몸을 이끌고 주적주적 비를 맞으며 가고 있지만 레의 골목길을 걷고 있는 지금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상쾌한 기분마저 든다.
여행할 때 난 시장만큼이나 골목길을 좋아한다. 특히, 구시가지 또는 옛 마을의, 그 사람 냄새나는 골목길을 좋아한다. 현대화되고, 문명화된 도시의 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냄새는 어디가나 정이 들지 않는다. 내가 어린 시절 일반 주택가에서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부터 지금까지 아파트에서만 살고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일반 주택가의 골목길을 걸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 옛날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면 더욱.
레에도 그런 골목길들이 있어서 좋다. 메인 바자르와 같은 현대화된 길 뒤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구시가의 좁은 골목길, 그리고 시골마을 같은, 변두리 옛 마을의 구불구불한 골목길. 작은 도시라 짧은 산책으로도 이 두 개의 골목길을 맛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主)도로의 교통이 번잡하고 매연이 심하기 때문에 차가 다닐 수 없는 골목길을 점점 더 애용할 수밖에 없다. 레의 짬밥은 얼마나 뒷골목 길을 잘 알고 있느냐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구시가의 골목길은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복잡한 미로처럼 되어 있다. 골목 사이사이에는 갖가지 작은 상점이나 카페, 그리고 빵 굽는 곳 등이 있다. 때론 영화 포스터 등도 볼 수 있다. 길은 맨땅인 곳도 있고 돌로 포장된 곳도 있다. 구도심의 골목길에서는 이슬람 사원의 하얀 돔을 자주 보게 된다. 반면에 불교 사원은 산이나 외곽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사원에 대한 두 종교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도심 골목길에 불교 사원은 없지만 불탑은 가끔씩 볼 수 있다. 답답한 미로 같은 골목이지만 가끔씩 고개를 들어보면 곳곳에서 레 왕궁이나 곰파 그리고 저 멀리 설산이 보이곤 해서 답답함이 금세 씻겨 나간다.
반면에 시가지 주변에 있는 옛 마을은 마치 농촌 시골 마을의 골목길과 같다. 건물과 건물, 때론 담과 담으로 만들어진 좁은 골목길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임에도 길 잃어버리기 딱 좋다. 그리고 골목길 바로 뒤로는 텃밭이든 나무든 항상 푸르름이 둘러싸고 있다. 담장 위에는 연료로 쓰기 위해 말리고 있는 소똥도 자주 볼 수 있다. 소똥을 벽돌처럼 만들어서 담장으로 두르고 있는 곳도 있다.
이 마을 골목길 안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티베트 사원도 있다. 이름이 샹카르 곰파(Sankar Gompa)라고 하는데 이 마을을 찾고 싶다면 샹카르 곰파를 찾아오면 된다. 마을 곳곳에 탑도 많다. 구시가 골목길과 가장 큰 차이 중의 하나는 여기 골목길 곳곳에는 물이 흐르는 도랑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집집 마당마다 텃밭을 가꾸기 때문이리라.
어찌되었건 아직도 몸 컨디션은 완벽하지 않다. 언제쯤 정상의 컨디션을 찾으려나? 이런 경험도 처음이다. 그저 더위에 조금 지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망가져본 적은 처음이다. 아! 고산증, 그거 장난 아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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