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해진 그리스 마을, 카야쾨이(Kayakőy)
페티예(Fethiye) 근처에는 예전 그리스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 있다.
이름은 카야쾨이(Kayakőy).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해진 마을이다. 1923년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인구 교환에 따라 마을에 살던 그리스인들이 본국인 그리스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터키와 그리스의 인구 교환은 1919년에서 1922년에 있었던 그리스-터키 전쟁의 결과다. 그리스가 당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그리스의 패전으로 종결되었다. 1923년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협정에 따라 터키 내의 그리스 정교도와 그리스 내의 무슬림을 대상으로 하는 인구 교환이 실행되었다. 국가 간 합의에 의한 최초의 인구 교환이라지만 강제 추방의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별로 볼 게 없다는, 앞선 많은 여행자들의 이야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카야쾨이 마을이 욀루데니즈(Ölüdeniz) 해변 가는 길에 있는데, 그 마을에서 시작해서 욀루데니즈로 가는 트래킹 코스가 좋다는 호스텔 직원의 귀띔이 있었기에 겸사겸사 들려볼 생각이었다.
카야쾨이 가는 버스는 페티예 중심가에 있는 모스크 옆 버스 정류장에서 탄다. 블로그들에 의하면 카야쾨이가 페티예와 욀루데니즈 중간에 있기 때문에 카야쾨이를 먼저 거치고 나서 욀루데니즈를 간다고 하던데 내가 탄 버스는 욀루데니즈를 먼저 들렸다가 카야쾨이를 거쳐 페티예로 돌아가는 버스였다. 아마 여러 노선의 버스들이 카야쾨이와 욀루데니즈를 오가나 보다.
페티예에서 카야쾨이는 차로 15~20분이면 가는 거리다. 다만 중간에 검문을 한다. 모든 승객의 신분증을 걷어간다. 옆 마을에 가는 데도 검문이라니 당황스럽다.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여권 복사본을 보여주니 괜찮단다. 여권 복사권이 곳곳에서 꽤 도움을 준다.
카야쾨이에 내리자마자 눈에 보이는 풍경은 산비탈에 늘어선 집들의 잔해다.
서남쪽으로 늘어진 산줄기의 가파른 경사면에 돌담과 돌벽만이 휑하게 남은 흉가들이 돌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소개(疏開)된 마을이라기보다는 마치 폭격을 맞았던 마을 같다. 생각보다 마을도 크다.
별칭이 '유령도시'라더니 그냥 붙은 이름이 아니다.
햇살이 강렬한, 맑은 날의 상쾌한 오전이었지만 관광객들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 폐해의 마을에 들어서자니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대낮에 혼자 거대한 공동묘지에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그것도 폐허가 된. 저녁이라면 엄두조차도 내지 않을 것이다. 별칭이 '유령도시'라더니 그냥 붙은 이름이 아니다.
막상 마을의 골목길을 걷자마자 그런 생각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오히려 돌무더기 잔해들 사이로 난 돌길, 그 사이사이에 핀 이름 모를 들꽃들이 이름 모를 한 여행객들을 반겨주는 것 같다. 귓가에서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날아드는 꿀벌들과 함께.
돌로 된, 지금은 너무도 고즈넉한 굽이굽이 골목길을 걷다보면 문든 문득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되돌아 간 기분이 든다. 이 돌길을 따라 어른들은 밭으로 일하러 가거나 이웃집으로 마실을 간다. 아이들과 함께 소나 양들도 뛰어다닌다. 그러다가도 주말이면 모든 가족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교회에 간다.
돌길 바닥에 깔린, 번질번질하고 미끄러운 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동안 이곳을 지나다녔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마을의 폐허들은 주로 18세기의 유적이라고 하지만 마을에 대한 기록은 거의 7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내려간다고 한다. 천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이 살아왔던 마을이었다. 한때는 이곳에 2천여 호의 주택에 6천 명 이상의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큰 교회만 3개에 작은 교회는 더 많았다. 물론 학교도 있고.
좁은 돌담길을 사이로 옹기종기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자신들의 터전이자 고향을 떠나야 했을 때의 슬픔과 절망 그리고 분노는 어떠했을까? 그리스계 사람들이라고 말이 그리스가 본국이지 그들의 할아버지에 할아버지 또 그 훨씬 이전부터 살았던 이곳이야 말로 그들의 진정한 본국이자 고향이었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의 비장함이다.
마을이 굽어보이는 곳에 올라가 돌무더기 담장 위에 걸터 앉아 폐허가 된 마을을 둘러보고 있자니 많은 상념들이 떠나질 않는다. 담아간 커피를 마시며 윙윙거리는 벌과 함께 한동안 물끄러미 바로 보고만 있다. 생각은 많지만 할 말은 없다.
수백 년 역사를 담은 마을의 이곳저곳을 더듬다 보니 운치도 있다. 호적한 마을의 돌담과 돌무더기, 그 사이에 핀 들꽃들의 향기와 그 들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들의 노래가 역사의 비해 속에서도 나름의 멋을 준다.
마을 한 가운데의 너른 공터에 큰 교회가 하나 있다.
원래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이미 돌담에 큰 개구멍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그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철망 뒤에서 교회 사진을 찍고 있던 나를 보고 철망 안에 있던 여행객이 손으로 들어오는 곳을 알려준다.
잠시 개념 없는 관광객이 되기로 한다. 제법 규모 있는 교회라 옛 마을의 인구를 엿볼 수 있다. 바닥에는 작은 돌들을 세워 깔아서 문양을 만들었다. 외부는 단순했지만 내부는 나름 멋있다. 입구에 19세기에 지어진 교회라는 팻말이 있다.
폐허가 된 유적지에 서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역사의 허망함, 인생의 무상함 등등. 그러나 여기서만은 다르다. 나고 자란 고향과 오랜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떠나야 했던 그때 그 사람들의 상심과 분노가 들린다. 역사에 저항할 수 없었던 힘없는 민초들의 그 소리 없는 아우성.
by 경계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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