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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중문화 예술인들의 충성 경쟁 3: 왜 유독 대중예술인들에게만?

경계넘기 2021. 5. 17. 22:04

 

중국 대중문화 예술인들의 충성 경쟁 1: 왜 그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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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중문화 예술인들의 충성 경쟁 3: 왜 유독 대중예술인들에게만?

 

 

왜 유독 대중예술인들에게만 가혹하게 충성을 경쟁을 강요하는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중국 공산당과 대중문화 특히 영화와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1921년 창당한 이래 중국 공산당과 영화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다.

 

 

중국 공산당이 영화를 대중 선전 선동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삼은 것은 농민이였다. 중국 공산당의 생존은 이데올로기 교육을 통해 얼마나 많은 농민들을 혁명 세력으로 키워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당시 농민의 대다수는 글을 읽을 수 없는 문맹이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농민들에게 영화 한 편이 주는 대중 교육, 대중 선동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영화가 중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96년의 일이다. 도입 초기에는 주로 서양인들이 운영했지만 1920년대에 들어서면 중국인들도 점차 영화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중국 지식인들도 19195·4 운동을 계기로 영화의 예술성과 정치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21년 당시 영화의 중심 상하이(上海)에서 창당한 중국 공산당에게 영화가 가진 대중성과 정치성은 더욱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부터 좌익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현실 참여적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더니만, 중국 공산당은 1930년대 들어서 영화가 가진 사회개혁과 대중동원의 정치적 기능을 확연히 인식하고 좌익영화운동(左翼電影運動)을 전개하며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참여했다.

 

중국 공산당이 얼마나 영화에 애착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옌안(延安) 시기의 이야기다.

 

1차 국공 내전 와중인 1934년에서 1935년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군의 맹렬한 추격을 피해 서북부의 오지인 옌안(延安)까지 쫓겨 가서 그곳에서 상당 기간 칩거했다. 대장정 기간 거의 모든 것을 상실한 중국 공산당이지만 그곳에서도 옌안영화단(延安電影團)을 조직하여 영화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설비가 열악해서 극영화는 단 한 편도 제작하지 못했지만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출처: Wikipedia)

 

다른 하나는 제2차 국공내전 시기의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중국 대륙에는 다시 공산당과 국민당군과의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치열한 국공내전의 와중에도 중국 공산당은 부족한 영화제작 설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군 지배 지역의 영화 설비를 접수하기 위해서 고심했다.

 

19464월 공산당은 국민당이 접수하려는 동북 창춘(長春)의 영화 제작소에 비밀리에 인원을 급파하여 먼저 차지했다. 국민당군의 진공작전으로 창춘이 함락되자 공산당은 이곳의 영화 인력과 설비들을 북쪽의 싱산(興山)이라는 곳으로 옮기고, 이곳에 이후 중국 최대의 영화제작소가 되는 동북영화제작소(東北電影制片廠)을 건립하였다. 이곳을 통해 국공내전 기간에도 영화 제작은 물론이고 영화 인력까지 키워냈다.

 

사실 중국 최고의 영화대학인 베이징영화대학(北京電映學院)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한 바로 이듬해에 세운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주의 중국이 1949101일에 건국되고, 베이징영화대학이 19505월에 세워졌으니 국가를 건국하고 단 7개월만에 영화대학을 설립한 셈이다. 국가 건설의 틀도 채 잡히지 않은 시기에 영화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했으니 중국 공산당이 영화에 가졌던 각별한 애정을 익히 알 만하다.

 

 

 

중국 공산당의 영화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애정은 중국 영화에 저주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교육과 전파, 대중 선전과 선동의 수단으로써 영화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중국 공산당은 영화에 대한 통제 역시 결코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주의 혁명에 영화가 끼쳤던 공헌만큼 중국 공산당은 영화에 대한 통제를 생존의 문제로 인식한다.

 

중국 정부가 대중문화 예술인들에게 유독 충성을 강제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정풍운동, 즉 숙청의 역사는 대부분 대중문화 예술인들에서부터 시작했다.

 

사회주의 중국의 건국 이래 정풍운동은 당의 기강을 잡기 위해 일어났다. 사상 교육과 조직 강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지만 그 핵심은 정적들에 대한 숙청과 사상 개조를 통해 마오쩌둥(毛澤東)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에 있었다.

 

정풍운동의 시작은 옌안이었다.

 

1942년 마오쩌둥은 자신을 비판하는 반대파를 제어하기 위해 옌안문예강화(延安文藝講話)라는 것을 발표했다. 옌안문예강화의 요지는 모든 문화예술은 반드시 당과 계급에 종속되고, 여타의 독립적인 사상과 문화예술의 예술적 기능은 부정한다는 것으로 마오쩌둥 자신과 당을 비판하는 그 어떠한 발언과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당원들에 대한 숙청 그리고 사상 교육과 개조를 강화하면서 마오쩌둥 중심의 일원적 권력체계를 확립했다.

 

2차 정풍운동은 영화 우쉰전(武訓傳)에서 비롯되었다.

 

영화 우쉰전은 1950년 즉 사회주의 중국의 건국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다. 개봉 당시 흥행뿐만 아니라 편단의 좋은 반응도 얻었다. 그런데 19515월 돌연 마오쩌둥이 인민일보에 직접 이 영화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을 신호로 대대적인 비판이 영화를 넘어 배우들에게까지 이어졌고, 끝내 영화는 상영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중국 공산당이 대대적인 문화예술 정풍운동을 일으켜 예술인들과 지식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사상 개조를 단행했다.

 

 

우쉰전 영화포스터와 인민일보 논단(출처: wushuchina.net)

 

3차 정풍운동은 반우파(反右派) 투쟁이었다.

 

반우파 투쟁은 사상의 자유를 선언했던 쌍백 운동(雙百運動)이 빌미가 되어 일어났다. 쌍백 운동은 스탈린 사후 동유럽에서 일어난 격렬한 스탈린 격화운동에 자극받아 일어난 사상운동이다. 중국 공산당은 급격한 계급 투쟁과 사상 개조로 인해 쌓인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19572월 사상의 자유를 허가했다.

 

그러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높아지자 19576월 중국 공산당은 돌연 태도를 바꾸어 쌍백 운동 기간 비판적 발언을 했던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이것이 반우파 투쟁이다.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중국 대중문화의 발전을 위해 자유로운 토론을 벌였던 수많은 대중예술인들은 그들의 발언이 빌미가 되어 반우파 투쟁과 대약진 운동으로 이어지는 3년 간 대대적인 숙청을 당했다. 이때 수십만 명의 예술인들과 지식인들이 노동 교화소, 감옥에 수감되거나 외딴 농촌이나 산간벽지 등으로 쫓겨났다.

 

 

반우파 투쟁 (출처: chosun.com)

 

4차는 정풍운동 끝판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다.

 

문화대혁명은 19665197610월까지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벌인 극단적인 사회주의 운동이자 권력 투쟁. 하지만 역시나 그 명분은 낡은 사상, 문화, 관습, 풍속에 두면서 대중문화계는 또 다시 숙청의 제1 대상이 되었다.

 

 

문화대혁명의 천안문 광장 (출처: Wikipedia)

 

이 시기 대부분의 대중문화 예술인들은 숙청당하여 농촌이나 군부대로 보내졌다. 대중문화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문화예술 활동이 금지되면서 중국은 문화의 암흑기로 들어갔다. 영화를 옐 든다면 1966년부터 1972년까지 단 한 편의 영화도 제작되지 못했다고 하니 서슬 푸른 당시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숙청당한 예술인들의 숫자는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문화대혁명 (출처: asia.nkkkei.com)

 

중국 대중문화 예술인들은 굴곡진 중국의 정치적 변동과 함께 했다.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는 곧 대중문화 예술인에 대한 통제다.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프로파건다의 중요한 수단인 이상, 대중문화 예술인은 중국 공산당의 뜻과 의지에 부합하는 대중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창작자이자, 때론 사회주의 대중동원의 선두에 직접 서서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

 

 

중국 정부가 기관지 등의 친정부 성향의 언론을 통해 방향을 잡아주면 대중문화 예술인들이 지지 성명을 내고, 이들의 이런 움직임은 곧 바로 일반 대중에게 확산되어 폭발한다. 대중문화와 대중문화 예술인들을 이용하는 중국 공산당의 전형적인 대중동원 방식이다.

 

 

중국 정부가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대중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그 효과도 가히 폭발적이다.

 

중국 정부가 대중예술인들에게 유독 충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