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꿈, 보헤미안의 삶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어 보다 자유로운 미래를 그린다

미얀마의 민주화와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며...

여행과 세계, 세계와 여행

1989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와 1980년 대한민국의 광주

경계넘기 2021. 5. 18. 18:41

 

 

1989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Bucureşti)1980년 대한민국의 광주

 

 

5월의 비 내리는 어느 날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Bucureşti)에 있었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Bucureşti)에는 혁명 광장(Piața Revoluției)이라는 곳이 있다. 1989년 루마니아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의 잔혹한 독재를 종결시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던 곳이다.

 

이곳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무료 워킹 투어(Free Walking Tour)의 가이드 덕분이었다

 

투어를 하는 내내 그가 투어 가이드인지 루마니아 현대사 강사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는 19891221일에서 25일 사이에 있었던 루마니아 민주화 시위를 혼신을 다해 설명했다.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가 혁명 광장의 구공산당 본부에서 연설을 하는 동안 부쿠레슈티 시민들이 보여준 분노와 저항 그리고 그들을 향한 보안대의 무차별 강제진압을 말해 주었다.

 

 

 

 

1989년 루마니아 민주화 혁명(Romanian Revolution)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

 

그는 1965년에서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를 통치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우상화를 동경해 북한 방식에 따라 자신에 대한 신격화와 족벌체제를 구축하고 아들에게로의 권력 세습까지 추구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차우셰스쿠의 통치는 잔혹했다.

 

그는 기존의 세쿠리타테(Securitate)라는 비밀경찰 조직을 자신의 친위대로 만들어 자신의 권력 강화에 적극 활용했다. 조직도 비밀경찰과 보안군으로 확대했다. 충성파 중에서도 주로 전쟁고아 출신으로 선발해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을 통해 요원을 만들었다. 그들은 루마니아 정규군보다 대우가 좋았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쿠리타테는 정보 수집, 구금과 고문, 살인과 암살 등을 통해서 차우셰스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1885년 한때 세쿠리타테는 11,000 명의 요원과 50만 명의 하부 정보원을 두었고, 전국에 1,100여 개의 도청센터와 320만 개 이상의 도청기를 설치했다고 한다. 당시 루마니아 전체 인구가 22백만에 불과했으니 차우셰스쿠가 국민을 얼마나 철저히 통제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철권통치도 19891221일 일어난 민주화 시위로 막을 내린다.

 

19891216일 루마니아 서부의 도시, 티미쇼아라(Timisoara)에서 시위가 있었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퇴케시 라슬로(László Tőkés)라는 목사의 체포를 반대하는 시위였다. 이 시위가 정부의 유혈 강경진압에 반발해 반정부 시위로 확대되었다.

 

시위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차우셰스쿠가 1221일 지지자들을 동원해 혁명 광장에서 관제 대회를 열기로 했다. 관제 대회에서 자신에 대한 지지 열기를 전국에 생중계하여 시위 분위기를 잠재우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관제 대회는 그가 생각하지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가 연설하던 중에 산발적인 야유가 터져 나왔고, 이에 군중들이 호응하면서 삽시간에 반정부 시위로 번져버린 것이다. 놀란 차우셰스쿠가 뒷걸음치는 모습까지 생중계되었다. 차우셰스쿠가 시위 진압을 명령하고 세쿠라타테 보안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하면서 혁명 광장은 삽시간에 살육 현장이 되었다.

 

 

 

가이드는 당시의 상황을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설명했었다.

 

보안대의 사격을 피해 혁명 광장을 빠져나왔던 시위대는 혁명 광장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대학 광장에 다시 집결했다. 대학 광장은 루마니아의 명문 대학인 부쿠레슈티 대학(Universitatea din București) 앞의 광장이다. 혁명 광장과 대학 광장을 연결하는 부쿠레슈티의 중심 도로 니콜라 발체스쿠(Nicolae Balcescu)에도 시위대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때 대학 광장과 니콜라 발체스쿠 도로에서도 시위대를 향한 보안군의 무차별 사격이 일어났다. 가이드는 대학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지붕을 가리키며 그곳에 보안군의 저격수들도 배치돼 시위대를 저격했다고 했다.

 

세쿠라타테만으로는 시위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차우셰스쿠가 일반 경찰과 정규군에게도 시위 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의 진압 명령을 받은 군과 경찰은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시위대 편에 섰다. 군과 경찰이 시위대 편에 서자 시위의 양상은 급변했다. 이제 시위는 세쿠라타테의 보안군과 정규군과의 교전으로 변했고 전세도 급속히 시위대 편으로 기울었다.

 

다음날인 1222일 시위대가 대통령궁으로 밀려오자 위기를 느낀 차우셰스쿠가 대통령궁에서 헬기를 타고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내 잡혀 1225일 크리스마스에 총살을 당하면서 그의 독재 권력도 종지부를 맞았다.

 

1985년 루마니아의 민주화 시위는 그렇게 민중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혁명 광장을 찾아 가는 길이었다.

 

 

혁명 광장, 정면의 건물이 구공산당 본부 건물
혁명 광장과 추모탑

 

아침부터 잔뜩 흐렸던 날씨는 워킹 투어를 하는 중에 끝내 비를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소강상태에서 길을 나섰지만 이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급하게 한 카페에 들어갔다.

 

도로가 바로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비오는 도로를 보고 있었다. 처음 마주하는 낯선 도시. 비까지 내리는 동유럽의 도시는 스산함마저 감돌았지만 앞서 들은 루마니아 민주화 시위의 여운은 여전히 머리에 남았다.

 

 

 

문득 지금 바라보고 있는 도로가 앞서 가이드가 설명한, 당시 시위대로 가득했던 니콜라 발체스쿠(Nicolae Balcescu) 도로라는 것이 생각났다. 서울의 세종로나 종로처럼 부쿠레슈티 중심가를 관통하는 중심 도로로 민주화 시위가 있었던 혁명 광장과 대학 광장을 연결하는 도로였다.

 

 

 

1989년 겨울의 루마니아 부쿠레슈티가 1980년 봄 대한민국의 광주와 오버랩 되었다.

 

 

니콜라 발체스쿠 도로는 광주의 금남로가 되고 구공산당 본부는 전남도청, 혁명 광장은 도청 앞 광장으로 변했다.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세쿠라타테 보안대는 신군부의 공수부대로 대체되었다. 차우셰스쿠가 도망가기 위해 탄, 막 구공산당 본부 건물을 떠나는 헬기의 사진은 전남도청을 선회하며 기총사격을 했던 헬기의 모습으로 변했다.

 

 

금남로 (출처: chedulife.com.au)
금남로 (출처: 연합뉴스)
전남도청 앞 광장(출처: 오마이뉴스)
(출처: 오마이뉴스)
(출처: 오마이뉴스)

 

다른 점이 있다면 1989년 부쿠레슈티는 승리했고, 1980년 광주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89년이나 1980년이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사람들의 열정과 희생은 같다.

 

2021518일 오늘.

 

주적주적 비가 내리는 길을 걷고 있자니 불현 듯 부쿠레슈티가 생각난다.

그날도 518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1980년의 광주와 1989년의 부쿠레슈티에 더해 한 도시가 더 오버랩 된다.

2021년의 미얀마 양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20세기의 잔혹함이 21세기에도 되풀이되는 것은 안타깝다. 

하지만 한국과 루마니아가 그랬듯 미얀마에도 봄은 올 것이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