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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카불(Kabul)과 베트남의 사이공(Saigon)

경계넘기 2021. 8. 18. 14:48

 

 

아프가니스탄의 카불(Kabul)과 베트남의 사이공(Saigon)

 

 

데자뷰(deja vu)란 이런 것일까!

 

2021815일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의 수도 카불(Kabul)의 대통령궁에 탈레반 깃발이 펄럭이고, 그 바로 직전에 아프간 정부가 항복을 공식 선언하고 탈레반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약속했다는 보도가 빗발쳤다.

 

20년간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아프간 정부군의 급속한 붕괴를 예측하지 못한 듯 카불은 혼돈 그 자체다. 전쟁의 당사자인 미국 역시도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미국대사관에는 미처 피난시키지 못한 자국민과 공관원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CH-47 치누크(Chinook) 헬기의 숨 가쁜 프로펠러 소리가 고동친다.

 

카불의 유일한 탈출구인 국제공항은 자국민을 대피시키려는 각국의 필사적인 노력과 수많은 아프간인들의 목숨을 건 탈출 러시로 이미 지옥이다. 미군은 공항의 질서를 확보하여 비행기로 자국민과 동맹국의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발포도 서슴지 않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들이 뉴스를 흐른다.

 

그래,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본 장면들이다. 북베트남군에 장악된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Saigon)을 탈출하려는 필사의 사투.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영화도 그때 그 모습을 지금처럼 생생하게 재현하지 못했다.

 

20218월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과

19754월의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너무도 닮았다.

 

 

대통령궁 장악과 동시에 전쟁 종식

 

 

 

오랫동안 사이공으로 불렸던 호치민시티(Ho Chi Minh City)에는 지금은 독립궁(The Independence Palace)으로 불리는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이 있다. 역사박물관으로 개방된 대통령궁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를 회상하게 만드는 현장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통령궁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우측 정원에 두 대의 탱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탱크 포문의 위치가 이상하다. 두 대의 탱크가 포문을 정확히 대통령궁을 겨누고 있다. 보통 이런 건물에 대포나 탱크가 있다면 건물을 방어하는 의미로 포문이 바깥쪽을 향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듯이 아무리 총알이 없는 빈총이라도 겨냥을 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두 대의 탱크는 지금이라도 바로 대통령궁을 향해 포격할 자세다.

 

 

 

두 대의 탱크는 중국제 T59 390호 탱크와 소련제 T54 843호 탱크다.

 

1975430일 오전 1130분에 북베트남 깃발을 매단 일련의 탱크들이 정문 철문을 부수고 대통령궁으로 진입했다. 그 직후 대통령궁에는 북베트남 깃발이 게양되고 남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패망을 고했다. 2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다.

 

정원의 두 탱크는 당시 대통령궁에 진입했던 북베트남군 304 기갑부대 휘하의 실제 탱크들이다. 북베트남 입장에서 적군인 사이공의 대통령궁은 자신들의 전쟁 승리를 상징하는 건물에 불과하다. 탱크의 포문들이 대통령궁을 향하고 있는 이유다.

 

 

대통령궁에 진입하는 북베트남 탱크 (출처: Wall Street Journal)

 

2021815일 아프간의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에 탈레반 깃발이 게양되었다.

 

탈레반의 카불 공략 직전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에게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약속하면서 항복 선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카불의 대통령궁에는 탱크 대신 탈레반 인수단이 대통령궁에 입성했다. 이로서 20년에 걸친 아프간 전쟁은 탈레반의 승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아프간 대통령궁 (출처: https://president.gov.af/)
대통령궁의 탈레반 (출처: businessinsider)

 

카불에서나 사이공에서나 탈레반과 북베트남군은 대통령궁에 무혈입성했다.

 

사이공에서는 탱크가 담장을 부수고 진입하면서 대통령궁을 무력 장악하는 듯했지만 사실상 정치적, 군사적 퍼포먼스에 불과하다. 탱크가 대통령궁에 진입하기 한 시간 전인 오전 1024분에 남베트남 대통령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모든 남베트남 군대에게 전투중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궁에는 남베트남 대통령과 그의 보좌진들만이 비무장 상태로 북베트남군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호치민시티의 대통령궁에는 몇 개의 회의실과 접견실을 볼 수 있다. 이들 방 중 어느 하나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터인데 그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카불의 대통령궁과 마찬가지로.

 

 

 

 

두 대통령의 야반도주

 

 

 

사이공 대통령궁의 건물 지하로 내려가면 지하벙커가 나온다.

 

그곳에는 베트남 전쟁을 진두지휘했을 지휘부와 상황실이 있다. 벽에는 베트남 전투 당시의 전투 지도들이 걸려 있고, 여러 대의 전화기와 통신기들이 이곳이 지휘 상황실이었음을 알려준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

 

당연히 대통령궁 지하에 최고 지휘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나라의 군 통수권자들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지 않았다. 카불과 사이공이 함락하기 직전 야반도주하듯 자신들만 도망쳤다.

 

2021815일 아프간의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대통령은 카불에 탈레반이 입성하기 직전 부인과 함께 엄청난 양의 현금을 가지고 국외로 도피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학살을 막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고 주장하며, “만약 자신이 아프간에 머물러 있었다면 수없이 많은 애국자가 순국하고 카불이 망가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도피 사실은 아프간 협상팀, 미국 외교관은 물론이고 그의 비서실장조차 몰랐다고 한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 (출처: 연합뉴스)

 

베트남의 사정은 한편의 폭탄 돌리기같은 코미디다.

 

사이공 함락 전 남베트남 대통령은 응우옌반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였다. 1967년부터 1975년의 패망 직전까지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베트남 전쟁을 지휘했다.

 

그런데 19754월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응우옌반티에우는 421일 부통령이었던 쩐반흐엉(Trần Văn Hương)에게 대통령직을 넘기고는 426일 가족들과 함께 14톤에 달하는 금은보화를 가지고 대만으로 도피해 버린다.

 

엉겹결에 대통령직을 받은 것인지 쩐반흐엉 역시 일주일 정도 대통령직을 수행하다가 사이공 함락 3일 전인 428일 군 장성 출신의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에게 대통령직을 다시 넘겼다. 4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북베트남군을 맞이한 대통령은 취임 3일차 즈엉반민이었다. 이런 폭탄 돌리기가 또 있을까?

 

 

응우옌반티에우 (출처: 위키백과)

 

 

카불과 사이공의 긴박한 탈출

 

 

 

이번에는 사이공 대통령궁의 옥상으로 올라가보자.

 

그곳에는 헬기 착륙장이 나온다. 정원의 탱크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헬기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헬기 앞으로는 북베트남군 비행기의 폭탄을 맞은 자리 두 곳도 표시되어 있다.

 

 

 

2021년의 카불이나 1975년의 사이공이나 함락은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갑작스런 함락으로 카불과 사이공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처절한 탈출이 이어지지만 이미 탈레반과 북베트남군에 봉쇄된 카불과 사이공에는 하늘밖에 탈출구가 없어 보였다.

 

 

카불(좌)과 사이공(우)의 미국대사관 (출처: 트위터)

 

1975430일 사이공.

 

전날부터 대사관 앞은 미처 사이공을 빠져나가지 못한 미국인들과 남베트남인들로 아비규환이었다. 이제는 정말 대사관 옥상의 헬기 착륙장만 남았다. 대사관을 경비하는 해병대원들은 아귀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막아내면서 그 속에서 자국 시민들과 선택받은 남베트남인들을 골라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헬기는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사이공 항만의 미 해군함정으로 사람들을 이송했다.

 

헬기 탈출은 전날인 29일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역시도 이렇게 빨리 사이공이 함락되리라고 생각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프리퀀드 윈드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이라 불리는, 미리 계획한 탈출 작전에는 4개 옵션의 탈출 작전이 있었다. 그 중에서 헬기 탈출은 마지막 4번째 옵션, 즉 최후의 수단이었다29일에는 미국 대사관 외에도 시내 곳곳의 헬기 착륙장에서 탈출이 이루어졌다. 사이공 대통령궁 옥상에서도 긴박한 헬기 탈출이 있었을 것이다. 이날 하루만해도 기껏해야 수십 명밖에 태울 수 없는 헬기가 수천 명의 사람들을 탈출시켰다.

 

 

 

30일 새벽에는 오직 미국 대사관에서만 헬기 탈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마저도 아침 7시 성조기를 수습한 마지막 미 해병대원들을 태운 헬기가 미국대사관을 떠나면서 모든 탈출 작전은 종료되었다.

 

 

사이공 미국대사관 탈출 (출처: New York Yimes)

 

2021815일 카불.

 

1975년의 사이공과 너무 판박이다. 이번에도 미국을 위시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이렇게 빠른 카불 함락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는 미국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헬기들이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사이공 탈출 작전에서 분명 헬기 탈출은 마지막 4단계였다. 질서 있는 안전한 탈출은 이미 물 건너 간듯하다. 각국 대사관들도 자국 국민들과 외교 인력들을 대피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카불의 미국대사관 탈출 (출처: businessinsider)

 

카불은 공포에 질린 아프간인들의 탈출 러시로 지옥으로 변했다. 탈레반이 봉쇄한 카불 역시 탈출구는 하늘밖에 없다. 사이공이 미국 대사관이었다면 카불은 국제공항이다. 미군의 통제 아래 있는 공항이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면서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면서 공항은 아비규환이다.

 

질서를 확보하기 위한 미군은 사격도 서슴지 않는다. 사격으로 죽은 사람들, 이륙하는 비행기의 바퀴에 매달렸다가 떨어지는 사람들, 비행기 탑승구에 처절하게 매달린 사람들, 활주로 위에서 달리는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이 뉴스를 메우고 있다. 그나마 카불 함락 후에도 남아 있던 한국 외교 인력 3명과 교민 1명이 817일 모두 제3국으로 무사히 탈출했다는 기사가 그나마 위로를 준다.

 

 

카불 국제공항 (출처: SBS뉴스)
카불 국제공항 (출처: news1)

 

 

불행한 두 서사의 시작과 끝에는 미국이 있다

 

 

 

카불과 사이공의 허망한 함락에는 미군 철수가 결정적 원인이었다.

 

아프간 전쟁은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당시 아프간 정권을 잡고 있던 탈레반이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을 보호하자 탈레반을 상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개시 두 달 만에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킨 미국은 이 전쟁을 쉽게 마무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탈레반은 잡초처럼 살아남아 20년 간 끈질기게 미국을 괴롭혔다.

 

미국은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2021414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드디어 아프간에서의 미군 철수를 선언했다. 미군 철수는 5월 초부터 시작했다. 미국이 414일 철수를 선언하고 아프간 정부가 815일에 항복을 선언했으니 딱 4개월 만의 일이다.

 

 

(출처: 글로벌이코노믹)

 

베트남 전쟁은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간 지속된 전쟁이다.

 

초기 전쟁은 남북 베트남의 내전 양상이었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군과의 전쟁이었다.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전된 원인은 미국의 참전에 있다. 1964년 미국이 희대의 조작극인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g Incident)을 계기로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 주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 역시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막대한 화력을 쏟아부었음에도 이러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급기야 미국은 1973127일 전쟁 개입 종결을 선언하고 베트남에서 발을 뺐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1975430일 사이공이 북베트남 수중에 떨어졌다.

 

달랑 4개월을 버틴 아프간에 비해 2년여 동안 버틴 남베트남이 그나마 잘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북베트남의 실질적인 공세는 19753월 초부터 시작했다. 3월 말에 중부 지방의 거점 도시인 후에(Hue), 다낭(Da Nang)을 장악한 북베트남군이 바로 사이공을 목표로 진격하여 430일 사이공을 장악했다. 북베트남군의 본격적인 공세 후 채 2달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다.

 

대체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무엇을 배웠던 걸까?

 

 

(출처: The Atlantic)

 

 

압도적인 군사 우위에도 패망

 

 

 

미국만을 탓할 수는 없다.

아프간이나 남베트남이나 압도적인 병력 우위에도 허무하게 졌다.

 

아프간 전쟁에서 탈레반의 병력은 핵심 전투 병력이 6만 명, 여기에 탈레반을 추종하는 지역 무장단체 대원이 9만 명 정도일거라 추정한다. 합쳐도 15만 명 정도의 병력이다. 무장 수준은 형편없다. 공군력은 전무한 상태에 소총과 로켓추진수류탄 정도가 무장의 전부. 군복도 따로 없어서 한국의 옛 얼룩무늬 중고 군복을 입고 있다는 기사도 나온다.

 

반면에 아프간 정부군은 30만에 육박한다. 탈레반에 비해 2배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력은 압도적이다. 미군의 막대한 지원을 막아 탱크에서 전투헬기, 전투기까지 어느 나라의 정규군 못지않은 화력을 보유하고 있다.

 

1975년 초 남베트남군의 병력과 화력 역시 북베트남군을 압도했다. 병력은 두 배 이상, 대포와 탱크는 2~3배 이상 많았고, 여기에 1,4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프간 정부군 (출처: CNN)
탈레반 (출처: CNN)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이라고,

대통령이 돈 들고튀는 나라에서 누가 목숨 걸고 싸우겠는가!

 

호치민시티의 대통령궁을 거닐면서 베트남 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듯이,

어느 날 아프간 카불의 대통령궁을 가게 된다면 이 전쟁이 생각날 게다.

 

 

by 경계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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