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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000, 세계여행 준비: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기(201811)

경계넘기 2018. 12. 24. 23:56


세계여행.

 

거창해 보이긴 하지만 내게는 그냥 시간제한이 없는 여행이다. 가는 곳도 제한이 없다.

사실 아무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돈이 제한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돈과 시간의 싸움이다

돈과 시간에 여유가 다 있는 사람이라면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여행을 떠날 때에도 이 두 가지가 항상 걸림돌이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

 

두 가지가 다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평생 못가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정년퇴직을 한 후에 세계여행이든 긴 여행이든 떠날 거라고 다짐한다

그때면 시간과 돈에 모두 여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둘 중에 하나라도 있다면 그냥 떠나야 한다. 여행은 그게 진리다

다 갖춰진 사람이 거의 없듯이 다 갖춰서 떠나는 여행자도 거의 없다


시간은 있지만 돈은 없다

어떻게 경비를 마련해며 여행을 지속해야 하는가가 나의 이번 여행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다

말이 세계여행이지 경비 조달에 실패하면 다음 달에라도 들어와야 한다.

 

세계여행을 준비하면서 이전의 여행 준비와 확연히 달랐던 점이 있었다.

이전의 여행 준비가 무언가를 사는 것이었다면 세계여행의 준비는 버리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렸다!

 

집도 빼고,

힘들게 모은, 손때 묻은 책과 영화 DVD도 버리고,

하나하나 불어났던 살림살이도 싹 다 버리고,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내 첫차도 버렸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여행이기에 남겨둘 수가 없었다.

 

진정 몰랐다. 

버리는 작업이 이렇게 힘들 줄.

육체적으로도 피곤했지만 정신적으로도 무척이나 피곤했다.


추억과 애정이 담긴 것들을 골라내고 버리는 작업은 마치 삶을 정리하는 일 같았다.  손때 묻은 물건들을 버리는 일은 추억을 버리는 작업이었다그 많은 추억들 속에서 몇 가지만을 추려내야 하는 일은 무척 많은 시간적, 정신적 노동력을 요했다때론 책 하나하나를, 영화 DVD 하나하나를 들여다봐야 하는 작업이었고, 내 흔적을 내 손으로 지워야 하는 작업이었다.

 

무언가를 버리는 일은 환경문제와 뗄 수 없는 작업이었다. 무엇 하나 함부로 버릴 수도 없지만, 버려서도 안 된다. 사는 것 보다 버리는 것이 더 어려웠다가전은 가전 수거 센터에,  가구도 쓸 만한 것은 재활용 센터에, 그렇지 않은 것은 스티커를 붙여서 밖에 내놔야 했다.

 

쓰레기라고 할지라도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은 재활용 수거함에 분리해서 넣어야 했다재활용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냥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면 안 되었다태울 수 있는 것은 일반종량제 봉투, 태울 수 없는 유기그릇이나 머그컵 등은 특수 마대라는 것을 사서 버려야 했다. 알 수 없는 것도 너무 많았다대체 비디오테이프나 카세트테이프는 어디에 버려야 하고, DVD는 어디에 버려야 하는지 등공부 엄청 했다.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도 있었다. 가정집 쓰레기를 일괄 수거해 가는 업체를 쓰면 된다그런데 이사 비용보다 더 들 뿐만 아니라버리는 것과 버리지 않는 것을 완전히 분리해서 정리해 둔 다음에 불러야 해서 좁은 집 안에서 짐을 내려놓고 이를 일괄적으로 다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책장 4개에 있는 책만 바닥에 내려놓아도 발 딛을 틈이 없는데 다른 것을 분리해내기란 쉽지 않다하나하나 그때그때 치우면서 정리해야 분리가 가능했다

 

서너 일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거의 열흘 가까이 걸리고 말았다.

거의 밤새 분리하고 버렸다.

혼자서.

  

이제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부모님 댁에 맡긴 책 조금과 트렁크 몇 개,

그리고 여행에 가져갈 큰 배낭 하나와 작은 배낭 하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 남은 모든 것이다.

 

아주 긴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는 이전 여행들과 전혀 달랐다.

   

가기도 전에 지쳤다.

버리는 중간 중간 여행 준비도 한 것 같은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

버리는 중간 중간 여행에 가져가야 할 것들을 그때그때 배낭에 담아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발하기 며칠 전에 산지 석 달도 안 된 핸드폰을 잃어 버렸다.

 

그렇게 내가 가진 거의 대부분을 자의든 타의든 버리고 나서야 떠날 준비가 되었다.

 

버릴 때는 힘들었는데 버리고 나니 몸이 가벼워진다.

여행은 역시 버림이 미학이다.

 

그래도 배낭은 무겁다.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 많나 보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