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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짱 살이 1: 베트남 ‘통일의 날’과 남베트남 패망 (20240429)

경계넘기 2024. 4. 29. 17:20

 

 

베트남 통일의 날과 남베트남 패망

 

4월 30일,
내일이 베트남 국경일인 통일의 날(Ngày Thống nhất)’이다.

 

 

이어지는 51일 노동절과 함께 베트남에서는 흔히 않는 연휴다.

 

오늘 월요일이 대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난 토요일부터 시작되는 황금연휴가 되었다. 냐짱은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관광지라 지난주부터 내외국인 관광객들로 해변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묵고 있는 호텔에도 사람들로 꽉 찼다. 베트남 신문(VN Express)에 의하면 이번 황금연휴에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관광지로 달랏(Da Lat), 다낭(Da Nang)에 이어 냐짱이 3위로 선정되었다.

 

 

 

 

이 날은 남북 베트남의 통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430일이 무슨 날이기에 베트남이 이 날을 통일의 날로 정하고 기념하는 것일까? 그건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당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Saigon)을 점령한 날이 1975430일이기 때문이다. 이 날 남베트남이 패배를 선언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종결되었다. 남베트남의 패배는 곧 공산주의 북베트남이 자본주의 남베트남을 하나의 공산주의 국가로 통합시켰음을 의미한다. 이 날을 승리의 날(Ngày Chiến thắng)’, ‘남부 해방의 날(Ngày Giải phóng miền Nam)’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승리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패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국가로서 남베트남 편에 서서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우리에게는 만감이 교차하는 날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공식적으로 남북 베트남이 통일되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출범한 날은 197672일이다.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베트남은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시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호찌민(Ho Chi Minh)이 이끄는 베트민(Viet Minh)이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며, 북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에 프랑스는 남베트남 사이공(Saigon)을 중심으로 베트남 국가를 세웠고, 이 두 정부 간의 대립이 베트남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발발

 

베트남 전쟁은 20세기 중반, 냉전이 고조되던 시기에 벌어진 장기적인 분쟁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히 두 나라의 충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이념 대립의 현장이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은 임시적으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나뉘었다. 전쟁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Viet Cong)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 양상으로 시작했다. 이때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다가, 196487일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월등한 화력을 바탕으로 헬리콥터를 활용한 전술과 대규모 폭격으로 공격했고,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지하 터널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로 맞섰다. 전쟁 과정에서 베트남 전역이 큰 피해를 입었고,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막대한 화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미국은 승기를 잡지 못했고, 급기야 1973127일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베트남 전쟁 (출처: The Atlantic)

 

 

그리고 1975430일의 사이공.

 

미군 철수 이후에도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계속해서 남베트남을 공격했다. 1975430일 아침, 불안감 속에서도 사이공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각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이미 사이공으로의 진격을 시작했고, 남베트남의 수도를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공세를 펼쳤다.

 

그날 그 시간에 미국대사관은 아비규환이었다.

 

미국도 이렇게 빨리 사이공이 함락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미처 사이공을 빠져나가지 못한 미국인들과 남베트남인들이 새벽에 미국대사관으로 몰려들었다. 북베트남군에 완전히 포위된 사이공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오직 미국대사관 옥상의 헬기 착륙장뿐이었다. 헬기는 미국대사관 옥상에서 사이공 항만의 미 해군함정으로 사람들을 이송했다. 이 헬기를 타고 한국의 대사, 총영사관 직원들과 기자들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아침 7시 성조기를 수습한 마지막 미 해병대원들을 태운 헬기를 마지막으로 탈출 작전도 끝났다.

 

 

베트남 전쟁 (출처: The New York Times)

 

 

그리고 오전 1130,

 

북베트남 깃발을 매단 일련의 탱크들이 남베트남 대통령궁의 정문 철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그 직후 대통령궁에는 북베트남 깃발이 게양되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공식적인 남베트남의 패망이었다.

 

 

남베트남 대통령궁으로 돌진하는 탱크 (출처: The Wall Street Journal)

 

 

호치민 시티(Ho Chi Minh City)에는 당시의 대통령궁이 독립궁(The Independence Palace)으로 이름을 바꾸어 역사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독립궁 앞 정원에는 포문이 독립궁을 향해 있는 두 대의 탱크가 있다. 그게 당시 대통령궁의 철문을 부수고 진격했던 중국제 T59 390호 탱크와 소련제 T54 843호 탱크다.

 

그렇게 1975430일은 남베트남의 패망일이자 북베트남의 전승일이 되었고, 남북 베트남이 통합되어 사회주의 베트남으로 출범한 날이 되었다. 누구의 승리가 되었든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이루어짐으로써 베트남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 국가 재건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포신이 지금도 대통령궁을 향해 있다

 

 

남베트남 사람에게는 아픔일 수도 있다.

 

430일은 호찌민 시민들을 위시한 남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속 편히 말할 수 없는 치욕의 날일 수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다. 19649월 의료부대를 시작으로 30만 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국인으로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날이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