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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 여행/터키(Turky, 튀르키예)

D+166, 터키 차나칼레 2-1: 겔리볼루(갈리폴리) 전쟁터 오가는 길, 터키의 호젓한 밀밭길(20190429)

경계넘기 2020. 8. 29. 12:31

 

 

겔리볼루(갈리폴리) 전쟁터 오가는 길, 터키의 호젓한 밀밭길

 

 

최악의 전투, 겔리볼루(Gelibolu) 또는  갈리폴리(Gallipoli) 전장(戰場)에 간다.

 

숙소에서 바로 길을 건너면 겔리볼루 반도에 들어가는 페리 선착장이다. 겔리볼루 반도의 Eceabat 마을로 가는 배는 매시간 있다. 9시 배를 타고 20여 분을 달리니 도착이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넘는다. 물살은 다소 거칠다. 거친 물살을 가로 질러 가자니 거대한 배도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는 느낌이다. 배에서 보는 해협은 또 다르다.

 

 

 

Eceabat 마을 선착장에서 겔리볼루 전투 유적지 초입에 있는 Kabatepe Museum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한다. Kabatepe Museum은 겔리볼루 전투 박물관이다.

 

마을 선착장에 내리니 Kabatepe로 가는 버스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놈의 버스가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주위의 사람들에 물어봐도 제각각이다. 혹자는 1030, 혹자는 11시, 혹자는 오후 1시 반이라고 한다. 친절하게 열심히 말씀들은 해주시는데 전혀 도움은 안 된다. 언제 출발하는지를 모르니 버스 주위만 맴돈다이미 2시간 가까이를 기다려 시각은 이미 11시 반이다. 현지인들도 출발 시간을 제대로 모르는 이놈의 버스를 더 이상 믿을 수가 없다.

 

 

 

걸어서 가기로 한다.

 

선착장에 서서 잠시 고민을 한다. 다시 돌아갈 것인가, 택시를 탈 것인가 등등. 그리고 내린 결정은 그냥 걸어가자. 일단 걸어 가보고 시간을 보면서 조정하기로 한다. 택시는 돌아올 때 타는 것으로. 괜히 이곳에서 시간만 버리고 말았다. 구글맵을 보니 이곳에서 박물관까지의 거리만도 거의 9km에 이르고 유적지에서도 격전지를 찾아다니려면 20km 이상을 걸어야 한다. 돌아올 때 택시를 탄다고 하더라도 거의 30km의 걸음이다. 

 

겔리볼루 작전을 역으로 걷는 셈이다. 

 

겔리볼루 작전은 해군 단독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는 1단계와 육군이 상륙 작전을 통해 해협을 장악하려는 2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 해전은 이곳 해협과 해안에서 벌어졌지만 상륙 작전은 이곳 해안이 아니라 반도의 반대편 에게해(Aegean Sea) 해안에서 전개되었다. 협상군은 에게 해안에 상륙해서 반도를 가로질러 해협 해안에 포진하고 있는 해안포를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 그 작전 길을 역으로 걷는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배로 건너서 오스만의 해안 포대가 있던 이곳에서 겔리볼루 반도를 걸어서 횡단해 에게해안의 상륙 지점으로 간다. 반도의 폭이 넓지 않아 다행이다.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터키의 시골 들판길이 너무 좋다. 소도 보이고 양도 보이고.

 

 

 

조금 지나니 노란 유채꽃 밭이 장관을 이룬다.

호젓하고 한가로이 노란 유채꽃 길을 걷는데 절로 흥이 난다. 

 

 

 

제대로 된 밀밭을 처음 본다. 

 

유채꽃 밭길이 끝날 무렵 낮은 구릉길을 넘으니 이제는 푸른 밀밭길이 바통을 이어 받는다. 제대로 된 밀밭을 보는 것조차 처음이다. 바람이 불면 드넓은 밀밭의 밀들이 마치 파도가 치듯이 흔들린다. 장관이 아닐 수가 없다. 바람에 휩쓸려 고개 숙인 밀은 햇빛에 반사되어 하얀 빛이 감돈다. 그럴 때마다 정말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듯하다. 소리도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햇살이 작렬하는 날이지만 보고만 있어도 가슴까지 시원하다. 버스 기다리며 났던 짜증이 확 달아난다. 이것만으로도 이 길을 걷는 가치가 충분하다.

 

박물관을 한 3km 남겨둔 지점에서다.

 

트럭 한 대가 내 앞에 서더니 타란다. 박물관에 가는 것 아니냐면서. 차를 보고 손을 흔든 것도 아니다. 여행객 같은 뒷모습에 차를 세워준 것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의 낡은 트럭이지만 지금 나에겐 산타클로스 같은 분이고 벤츠 못지않다. 덕분에 시간을 벌고, 힘을 아낀다. 걸어오는 길은 낮은 구릉 하나 정도 넘었고, 대부분은 평지였다.

 

 

 

 


 

 

전투지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걸었다.

 

돌아오는 편에는 버스는커녕 택시마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냥 기다리다간 밤길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서 지친 발을 다독이며 길을 나선다. 가다가 택시가 보이면 그걸 타든지 아니면 올 때와 같은 행운이 있을지도. 지친 몸을 이끌고 9km를 걸었다. 힘들긴 하지만 석양이 내리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의 터키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같은 풍경이지만 걸어올 때는 한낮의 풍경이었고, 지금은 석양이 지기 직전의 풍경이다. 햇살도 힘을 잃으니 햇살 아래를 걸어도 뜨겁지는 않다. 걷기에 너무 좋은 날이고 풍경이다.

 

바람이 오후 늦게 더욱 강해지면서 밀밭의 흔들림도 더 커진다. 몰아치는 밀밭의 파도가 내 지친 발걸음을 달래준다.

 

 

 

그 옛날 거친 상륙 작전에 무거운 군장을 메고 두려움에 떨면서 가파른 경사 길을 뛰어다녔을 군인들을 생각하며 마치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는 마음으로 걷는다. 불현듯 산티아고 길을 걷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지만, 막상 여행을 다니다 보면 오히려 자기를 들여다볼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곳과 새로운 사람을 계속 만나고, 또 계속 무언가를 결정하고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나하고의 대화는 항상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그런데 홀로 길을 계속 걷다 보니 나와의 대화 시간이 많아진다. 사람들이 산티아고 길을 걷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초년 운은 없어도 말년 운은 있나 보다.

 

이번에도 페리 선착장을 한 2km 남짓 남겨둔 지점에서 지나가는 오토바이 아저씨가 나를 태워주신다. 오토바이에 타긴 또 처음이다. 생기신 모습은 아까 트럭 기사 마냥 털 복숭이 농부이신데 역시나 나에겐 산타클로스다. 초반부터 이런 운이 있었다면 정말 좋을 터인데. 하긴 처음부터 이런 운이 있었다면 아름다운 터키의 들판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운이 적당할 때 찾아온 게다. 역시 초년 운보다는 말년 운이고, 운이 쭉 있으면 인생의 진정한 맛을 모른다.

 

터키 사람들은 지나가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든 인사를 한다.

 

차를 탔으면 손으로, 오토바이는 클랙슨으로라도 인사를 한다. 낯선 사람에게 인상을 쓰거나 경계심을 갖는 우리네와는 다른 모습이다. 가끔은 어디서 왔냐고 짧은 영어로 물어도 보시는데 코레아에서 왔다면 보통 엄치 손가락을 번쩍 든다. 정말 한국을 좋아하는 것인지 다들 그렇게 그냥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렇다 보니 이방인이 혼자 낯선 시골길이나 산길을 걸어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서운 것이 있다면 집체만한 개들이다.

 

시내에 있는 개들은 대체로 성격이 온순한데 시골 개들은 성격이 좀 있다. 이번에도 길을 걸으면서 여러 번 섬뜩했다. 개들의 몸집이 웬만해야지. 아무도 없는 외딴 길에서 이것들이 짖으면서 달려오면 반갑다는 것인지 물려는 것인지 도대체 가늠을 못하겠다. 지난번 셀축에서 개에게 살짝 물린 적이 있었던지라 신경이 많이 쓰인다.

 

아저씨가 오토바이로 선착장 바로 앞까지 태워 주신 덕분에 7시에 막 떠나려는 배를 잡아 탈 수 있었다. 걸어왔다면 1시간 후에 있는 다음 배를 타야 할 뻔 했다. 적당할 때 태워주셔서 시간을 1시간이나 번다.

 

배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의 일몰을 본다. 석양은 내가 걸었던 바로 그곳, 겔리볼루 반도 뒤로 떨어지고 있다.

 

 

 

오늘은 숙소에 두 명이나 있다.

16인실에서 혼자 자는 행운은 첫날 하루로 끝났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