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캅카스(코카서스)의 비극 2: 나치 유대인 학살의 교본,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

경계넘기 2020. 11. 10. 10:47

 

나치 유대인 학살의 교본,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의 수도 바쿠(Baku)에서 1988년에서 1994년에 있었던 아르메니아(Armenia)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Nagorno-Karabakh War)을 처음 알았고, 호잘리(Khojaly) 대학살과 같은 가슴 아픈 전쟁의 상흔들을 접했다.

 

역사는 어느 정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쓰게 마련. 아제르바이잔도 전쟁의 한쪽 당사자다. 다른 한쪽의 당사자인 아르메니아가 전하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넘어왔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바로 올 수 없었다. 전쟁이 남긴 앙금으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서로 국경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야간 기차를 타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로 갔다가 당일로 버스를 타고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Yerevan)으로 넘어왔다.

 

 

 

그렇게 힘들게 넘어온 아르메니아에서 난 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해야만 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

 

그것을 처음 마주한 순간은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 있는 아르메니아 역사박물관(History Museum of Armenia)에서였다. 이곳의 근현대 역사관에서도 아제르바이잔의 그곳처럼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 많은 비중을 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을 가득 채운 내용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현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근현대 역사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비극은 오히려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어 보였다.

 

 

 

 

D+108, 아르메니아 예레반 4: 아르메니아(Armenia)의 역사에 울고, 예술에 취하고(20190302)

아침 먹으면서 숙소에 있는 친구와 오랜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이 훌쩍 갔다. 그제, 어제 숙소에 이 친구와 나만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 친구의 나라는 슬로바키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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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궂은 어느 날 이 참혹한 역사를 좀 더 알고 싶어 찾아간 곳이 바로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관(Armenian Genocide Memorial & Museum)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버금가는 참극이었고,

오히려 히틀러가 모방하고 따른 나치 집단 학살의 교본이었다.

 

 

 

 

D+109, 아르메니아 예레반 5: 20세기 첫 대학살(Genocide)의 희생자, 아르메니아인(20190303)

아침부터 하늘이 구질구질하다. 이미 한바탕 비가 내렸는지 도로는 흠뻑 젖어 있다. 하늘도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관(Armenian Genocide Memorial & Museum)에 가려는 것을 아는 듯하다. 숙소를 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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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 이야기

 

 

일반적으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1915년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사건을 지칭한다. 1915년에 시작해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오스만 제국의 잔혹한 학살로 15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처참하게 죽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세 차례나 있었다. 1915년의 학살은 그중 가장 큰 학살이었을 뿐이다. 더욱이 이들 집단 학살은 나치의 그것처럼 오스만 제국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추진한 범죄였다.

 

아르메니아인은 흔히 유대인과 많이 비교된다.

 

고대 아르메니아는 로마와도 잠시 힘을 겨룰 정도로 강한 나라였다. 서기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최초의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 아르메니아는 주변의 강국들에게 오랫동안 지배를 받는다. 오랜 세월 동안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 페르시아 제국(Persian Empire), 셀주크 제국(Seljuk Empire), 몽고,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제국(이란), 러시아 그리고 소련에 의해 지배를 받아왔다.

 

16세기에서 19세기 사이 아르메니아는 서(西)아르메니아와 동()아르메니아로 나눠져 서아르메니아는 오스만 제국 그리고 동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 제국(이란)의 지배를 받았다. 서아르메니아는 지금 터키의 동부 지역이고, 동아르메니아는 지금의 아르메니아 지역이다. 19세기에 들어 동아르메니아는 러시아의 지배로 들어갔지만 서아르메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이어졌다.

 

 

현대 개념의 동서 아르메니아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오스만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졌다 한다. 하지만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서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차별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 언어, 역사를 지켜 나갔다.

 

19세기에 오스만 제국 안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략 3백만 정도로 알려져 있다. 서아르메니아 지역인 제국의 동부에 많이 살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 발칸, 소아시아 등 제국의 곳곳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시대적 배경: 제국주의의 확장 경쟁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일어난 20세기 전후의 시기는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치열한 영토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영국, 프랑스 등의 전기 제국주의 국가들에 더해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후기 제국주의 국가들까지 영토 확장에 뛰어들면서 경쟁은 극에 달했다.

 

유럽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가장 큰 재물이 되었다. 한때 서유럽까지 위협하며 중앙 유럽 헝가리에서부터 동유럽 발칸 반도에 이르는 방대한 유럽 영토를 지배했지만 이미 유럽 열강들에게 물어뜯길 대로 뜯기고 있었다.

 

 

1862년의 오토만 제국 영토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그 중에서도 러시아가 가장 집요했다. 러시아는 영토 확장과 함께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즉 부동항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남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18세기 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크림반도를 획득하면서 흑해로의 진출이 가능해졌지만 사방이 막힌 흑해에서 지중해 큰 바다로 나가려면 가늘고 긴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과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을 통과해야만 했다.

 

러시아가 바로 지중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흑해의 서쪽인 발칸 반도(Balkans)로 진출하거나 흑해의 동쪽인 캅카스(Kavkaz)을 지나 오스만 제국의 본토인 아나톨리아(Anatolia)로 진출해야만 했다. 따라서 발칸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 남캅카스를 지배하고 있던 페르시아 제국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캅카스(Kavkaz)는 카프카스라고도 발음하고, 우리에겐 영어식 이름인 코카서스(Caucasu)가 아직은 더 익숙한 지역이다. 흑해와 카리브해(Caribbean Sea) 사이에 있다. 캅카스의 남쪽, 그러니까 남캅카스는 현재 조지아(Georgia),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3국이 있는 지역이다. 남캅카스 서남쪽으로 오스만 제국(현 터키)의 본토인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가 접해 있다.

 

 

현재의 캅카스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러시아는 19세기 초 2차에 걸친 러시아-페르시아 전쟁(Russo-Persian War)을 모두 승리하면서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캅카스(Kavkaz)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다. 남캅카스의 동아르메니아도 러시아로 넘어갔음은 물론이다.

 

캅카스를 지배하던 페르시아가 사라진 이상 남하 정책을 지속하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전쟁은 캅카스과 발칸 두 곳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1877년에서 1878년에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캅카스와 발칸의 두 전선에서 맞붙었다. 바로 러시아-투르크 전쟁(Russo-Turkish Wars)이다.

 

캅카스 전선에서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가 캅카스와 붙어 있는 아나톨리아(Anatolia) 동부로 바로 진격해 들어갔다. 발칸 전선에서는 러시아가 당시 오스만의 지배에 있던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동방 정교회 연합을 주도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캅카스에서의 러시아-투르크 전쟁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러시아-투르크 전쟁 역시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발칸에서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이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했고, 캅카스에서는 러시아가 아나톨리아 동부 즉, 서아르메니아 지역을 장악했다. 캅카스의 동아르메니아에 이어 오스만 제국의 서아르메니아까지 러시아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러시아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축복으로 보였다. 러시아는 같은 기독교 국가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약속해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러시아가 지배한 발칸에서 같은 기독교 국가들의 독립을 목격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동아르메니아와 서아르메니아가 합쳐진 온전한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영국 등의 서유럽 열강들이 딴지를 걸었다.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서유럽 열강들은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으로부터의 러시아군 철군을 강제했다.

 

1878년 러시아가 물러나면서 오스만 제국에는 다시 아르메니아인들만 남겨졌다.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 강제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차별 폐지와 안전 보장에 대한 약속 역시 철군과 함께 요원해졌다.

 

 

 

1차 아르메니아 학살: 하미드 대학살
Hamidian Massacres

 

 

 

오스만 제국에 의한 최초의 학살은 1894년에서 1896년에 일어난 하미드 대학살(Hamidian Massacres)이다. 오스만 제국 안에 살았던 적게는 8만에서 많게는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되었고, 2,493개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 마을이 파괴되었다.

 

러시아가 철수하면서 오스만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달라졌다. 러시아-페르시아 전쟁과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통해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 약화를 목도한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민족주의가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실질적인 저항과 운동으로 이어졌고, 아르메니아 문제(Armenian Question)가 유럽 사회에 부상했다.

 

제국을 상실하고 이제 아나톨리아 반도로 쪼그라든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 곳곳에 산재되어 있어서 이들의 저항과 운동은 자칫 제국 내부의 분열을 야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인들의 독립은 아나톨리아 동부의 상실을 의미했다. 유럽 사회에 아르메니아 문제가 부상하면서 서유럽 강대국들의 간섭과 개입도 껄끄러웠다.

 

제국 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는 인식도 달라졌다. 적군인 러시아군의 아나톨리아 진군을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군으로 참전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미드 대학살은 이러한 내외적 상황에서 발생했다. 과도한 세금과 차별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아르메니아인들에 잔혹한 학살이 오토만 제국군과 쿠르드 민병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학살은 이스탄불을 비롯해서 제국 내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착지로 퍼졌고, 1896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다.

 

 

                     하미드 대학살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하미드 대학살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하미드 대학살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2차 아르메니아 학살: 아다나 대학살
Adana Holocaust

 

 

 

두 번째는 아다나 대학살(Adana Holocaust)1909년에 발생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아다나(Adana) 지역에서 일어났다. 3만 명에 가까운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1908년 술탄 압둘 하미드 2(Abdul Hamid II)의 전제 정치에 반발해 청년 장교단, 학생, 젊은 지식인들이 주축이 된 청년 투르크당(Young Turks)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 하미드 2세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헌법을 부활하고, 제도의 서구화 그리고 여성, 교육, 세제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아르메니아인들도 청년 투르크당의 새로운 정부를 지지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개혁 정치가 제국 내 소수민족들에게도 보다 나은 평등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청년 투르크당 역시 그들에게 그런 믿음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청년 투르크당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청년 투르크당은 약속한 대중 참여가 아닌 국가 권력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하고, 투르크 민족주의를 강화하여 제국의 통합을 꾀했다. 독립을 요구하거나 분열을 야기하는 제국 내 소수민족들에 대해선 강력한 탄압을 진행했다.

 

아다나 대학살은 그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추모관의 기록에 의하면 미리 계획된 학살이었다고 한다. 학살은 19044월 초에 있었다. 그 사전에 오스만 정부는 무기와 실탄을 지방의 터키인들에게 지급했고, 수백 명의 범죄자들을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지방의 터키 신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악성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집들에는 눈에 띄는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분노한 터키인들이 아다나의 시장과 아르메니아 주거지에 난입하면서 잔혹한 폭력과 학살, 방화가 일어났다. 지방 정부의 제재는 없었다.

 

 

          폭력과 화염이 휩쓴 아다나 아르메니아인 거주지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폐허로 변한 아르메니아인 거주지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폐허로 변한 아르메니아인 거주지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아르메니아인들도 자위를 위해 무장을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무장 대응에 의해 폭력과 학살이 잦아들 무렵 오스만 정규군이 아다나에 파견되었다. 군은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아르메니아인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며칠 후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학살이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오스만 정규군이 주도했으며, 그만큼 이전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규모도 컸다.

 

당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산채로 불에 태워져 살해되었다고 해서 홀로코스트(Holocaust)라 부르기도 한다.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전체를 의미하는 hόlos타다를 의미하는 kaustόs의 합성어인 holókausto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전체를 태우다holókauston는 신에게 동물을 태워서 제물로 바치는 행위 즉, 번제를 의미한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죽였으니 홀로코스트란 용어가 아다나 대학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추모관의 기록은 아다나 대학살이 청년 투르크당이 계획한 1915년 대학살의 서막이라는 말로 설명을 끝맺고 있다.

 

 

 

3차 아르메니아 학살: 아르메니아 대학살
Armenian Genocide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1915년에 시작한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사건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라 하면 이 사건을 말한다. 다년간에 걸친 학살로 15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추모관의 기록들은 대학살이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말살을 목표로 청년 투르크당의 오스만 정부가 단계적으로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증언한다.

 

사전 단계로 대학살을 위한 적절한 시기를 저울질하던 오스만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가장 적절한 시기로 잡았다. 1차 세계 대전이 19147월에 시작했으니 그 직후부터 터키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말살 정책을 은밀하고도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로 오스만 정부는 19152월부터 오스만 군대에서 복무하던 아르메니아인 군인들을 제거하였다. 아르메니아 출신 군인들의 보직을 전투가 아닌 단순 노무직으로 전환하여 무장 해제 시키고 총알받이로 이용하거나 직접 제거하였다.

 

 

 

두 번째 단계로 19152월부터 4월에 걸쳐 아르메니아 엘리트들을 제거하였다. 엘리트 집단에는 아르메니아인 정치가, 지식인, 언론인뿐만 아니라 작곡가, 시인, 작가 등도 포함되었다.

 

 

 

아르메니아 군인들과 엘리트 집단을 먼저 제거한 이유는 오스만의 말살 정책에 대항하는 저항의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단계로 아르메니아인 말살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은 191561일부터 시행된 강제 이주(deportation)였다.

 

 

 

오스만 정부는 제국 곳곳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 사막의 몇몇 정착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강제 이주 과정에서도 직접 학살하거나 물과 식량을 주지 않고 아사시켜 죽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을 당하거나 납치되어 성노예로 팔렸다. 도착한 시리아 사막의 정착지에서도 수십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되거나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었다.

 

정확한 아르메니아인 희생자의 수는 알 수 없지만 아르메니아 대학살에서 적어도 150만에서 200만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되었다고 보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아울러 수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떠나 전 세계로 이주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발생했다. 현재에도 아르메니아 본토보다 해외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더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아르메니아 본토에는 3백만 명, 해외에는 8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살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디아스포라 (출처: Wikipedia engish version)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원인: 제국주의의 희생양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인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절멸시키려 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가장 큰 이유는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에 있다. 오스만 제국 아래에서 차별받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19세기에 들어 점차 민족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19세기 말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기독교 유럽 강대국들의 지지를 받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이 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이 대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치열한 경쟁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19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오스만 제국 내의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을 통해서 오스만 제국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다.

 

이른바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이다. 분할 통치는 강력한 상대의 집중화된 힘을 분산시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거나, 피지배자들을 분열·적대시킴으로써 통치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전략을 말한다.

 

유럽 열강들 중에서도 19세기 내내 발칸과 캅카스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러시아가 가장 적극적으로 분할 통치 전략을 구사했다.

 

19세기 초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남캅카스 지역을 차지한 러시아는 무슬림이 다수였던 이 지역에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주를 촉진했다. 이는 남캅카스 내에서 무슬림들과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들과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해서 동 지역의 지배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남캅카스에서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과의 갈등을 조장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아나톨리아로 진출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을 이용했다. 오스만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의 민족주의를 촉진하고, 독립운동을 지지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에서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의 반목과 갈등을 조장했다.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약속한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여기에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세력 약화를 원했던 영국, 프랑스 등의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들도 적극적이었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을 분열시키는 데에는 유럽 열강들과 같은 기독교 세력인 아르메니아인들이 가장 적격이었다.

 

분할 통치에 이용당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철저히 제국주의 분할 통치의 희생양으로 남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의 처절한 고통에 직면하고 있을 때 이들 유럽의 기독교 열강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아울러 제1차 세계 대전도 중요한 배경을 제공했다. 추모관의 자료에 의하면 제1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과 독일은 전쟁을 기독교 세력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성전(Holywar; Jihad)으로 포장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은 제국 내의 단결과 지원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리고 독일은 북부 아프리카와 중동, 중앙아시아 등의 이슬람 국가들로부터의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종교를 전쟁 동원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 내의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들은 가장 먼저 제거해야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역시 제국주의의 무한 경쟁에서 발생한 것이니 결국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서구 유럽의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현대사의 비극이자 희생양이다.

 

지금까지 터키는 대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지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 일어났던 불미스런 사건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관을 나오면 바로 왼편으로 추모탑이 있다.

 

추모탑 안에는 죽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불꽃이 타고 있었다. 불꽃 주변에는 꽃들이 헌화되어 있었다. 잠시 묵념을 하고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픈 역사를 겪은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동변상련의 감정 때문이었을까.

 

 

 

아르메니아 역사에는 영광보다 아픔과 비애가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숱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켜온 강인한 민족정신이 깔려 있음을 느낀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