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캅카스(코카서스)의 비극 1: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끝나지 않는 비극,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Nagorno-Karabakh War)

경계넘기 2020. 7. 30. 21:19

 

 

추적추적 비가 오는 2월의 어느 날, 난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의 수도 바쿠(Baku)의 한 공동묘지를 걷고 있었다.

 

바쿠의 랜드마크 건물로 세 개의 불꽃을 형상화한 불꽃 타워(Flame Towers)를 찾아 가는 길이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나지마한 언덕 위에 있는 곳이라 걸어서 갔었다.

 

공원을 하나 지나서 올라서니 잘 정리된, 꽤 큰 규모의 공동묘지가 나왔다.

 

 

 

도심, 그것도 바쿠 최고의 랜드마크가 있는 곳에 웬 공동묘지인가 싶었다. 비석이 줄지어 서 있는 무덤가로 다가가 보니 비석에는 죽은 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그가 살았던 연대가 기록되어 있었다.

 

태어난 시기는 조금씩 달라도 대부분 죽은 연도는 비슷했다. 1990년에서 1992년 사이였다.

 

 

 

무의식적으로 내 입에서 새어 나온 소리가 있었다. ‘국립묘지!’

 

묘지의 이름은 Martyrs' Alley. 아제르바이잔과 바로 이웃하는 국가인 아르메니아(Armenia)와의 국경 전쟁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Nagorno-Karabakh War)에서 희생된 아제르바이잔의 군인들을 묻은 곳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걸었다. 대부분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굵어졌다. 누군가 비석 앞에 놓고 간 꽃도 비에 젖었다. 젖은 꽃이 처량해 보인다. 하지만 무덤의 주인들은 꽃 한 번 제대로 피워 보지도 못한, 못다핀 꽃 한송이다.

 

 

 

비가 내리는 국립묘지, 그냥 걸었다. 묘지가 끝나는 바닷가 언덕 위의 추모탑 안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름이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했던가. 이들의 죽음을 기리는 불꽃으로 보였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바쿠의 랜드마크였던 불꽃 타워가 혹시 이들을 기리는 건물이 아닌가 하는. 그저 아름답고 멋진 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속에 그런 의미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D+094, 아제르바이잔 바쿠 4: 바쿠의 불꽃 타워(Flame Towers)(20190216)

오늘도 아침에 비가 내렸다. 아제르바이잔의 겨울날씨는 이런 것일까? 바쿠에 온 이후로 해를 보지 못했다. 정오를 넘기니 비는 멈추었다. 잔뜩 찌푸린 날씨는 어쩔 수 없지만 비라도 그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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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떠나면서 이 땅에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는 일만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정치적인 갈등은 정치적으로, 역사적인 갈등은 학문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래마지 않았다.

 

이국의 여행자가 낯선 땅에서 전혀 생각지 않게 마주친 슬픈 역사였다.

 

 

며칠 전 하나의 기사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 지역서 교전사상자 발생’”.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군인들이 지난 2020712일 교전을 벌여서 사상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탱크와 박격포를 동원한 3일 간의 교전으로 양측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기사를 읽는데 그때 그 애잔했던, 비 오는 날의 애상이 떠올랐다.

대체 이 비극은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이야기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의 주권적 영토다. 아르메니아의 동남쪽, 아제르바이잔의 서남쪽에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두 나라의 국경지대에 있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영유권을 두고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동 지역에 대한 아르메니아로의 편입과 독립을 주장하고, 이에 아제르바이잔이 반발하면서 일어났다.

 

 

출처: 위키백과, 헤럴드경제 재편집(20200716)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전쟁은 1994년 휴전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6년간의 전쟁은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실효지배 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독립을 선포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휴전은 아르메니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휴전은 말 그대로 휴전일 뿐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쟁의 잔불은 꺼지지 않았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국제사회에서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여전히 국제법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남아 있다. 휴전의 결과가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인 곳에 아르메니아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셈이니 갈등이 끝날 수가 없다.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2008년과 2010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2016년에는 휴전 이후 가장 큰 충돌이 일어나 양측 포함 수십 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리고 20207월 또 다시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밀접한 이해국가인 러시아는 물론이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UN 등 국제사회의 중재와 노력에도 불굴하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갈등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왜 이렇게 갈등이 풀리지 않는 것일까?

 

얼핏 보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주권적 영토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자국으로의 편입이나 독립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면서 일어난 전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피상적으로 단정 지을 수가 없다. 아르메니아가 왜 아제르바이잔의 주권적 영토인 나고르노-카라바흐의 편입이나 독립을 주장하는지를 생각해 봐야하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는 이 지역 인구의 압도적인 다수가 아르메니아인이라는 데에 있다.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확정된 20세기 초반에는 인구의 95%가 아르메니아인이었고, 아제르바이잔인 인구 유입이 늘어난 1979년 무렵에도 75%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

 

그렇다면 왜 아르메니아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살고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의 영토가 되었을까?

 

나고르노-카라바흐는 1921년 당시 캅카스(Kavkaz)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에 의해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캅카스 지역-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고 있던 소비에트 중앙, 특히 스탈린(Joseph Stalin)192175일 일방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제르바이잔 편입을 결정했다. 그것도 전날인 74일 러시아공산당 코카서스 지국 중앙위원회가 다수결을 통해 아르메니아로의 편입을 결정했음에도 스탈린(Joseph Stalin)이 단독으로 하룻밤 만에 뒤집어버렸다고 한다.

 

대체 스탈린은 왜 그랬을까? 모른다. 그놈의 능구렁이 속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만은 혹자는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터키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터키와 같은 투르크계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당시 반() 볼셰비키 봉기를 주도했던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라고도 한다. 또 혹자는 스탈린의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으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대립시켜 캅카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어쩌면 셋 다일수도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던 아르메니아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결정이었으리라. 아르메니아인들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를 러시아 또는 스탈린의 잘못된 결정으로만 넘길 수 있을까?

 

강대국 일국의 잘못된 정치적 결정 때문만이라면 이후 정치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휴전의 결과로 생긴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독립을 국제사회도 인정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비에트 중앙, 특히 스탈린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은 사실 아르메니아 측의 주장이다.

 

아제르바이잔은 다른 주장을 내 놓는다.

러시아와 스탈린의 정치적 의도가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 결정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도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제르바이잔 편입이 결정된 1921년 당시에 동 지역의 압도적인 인구가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다만 아제르바이잔의 주장은 시간을 그때로부터 더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캅카스 남부 지역, 그러니까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 모두 원래 아제르바이잔인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살았었다고 말한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더 많이 살던 캅카스 남부 지역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 러시아와 페르시아(이란)와의 전쟁이 끝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러시아가 페르시아 제국(이란)으로부터 캅카스 남부 지방을 완전히 획득한 1828(투르크만차이(Turkomanchai) 조약) 이후 러시아는 동 지역의 이슬람인들(아제르바이잔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지금의 터키와 이란 지역에 살고 있던,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독력하고 지원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도 많다. 19세기 초반에는 현 아르메니아 영토에서조차도 아제르바이잔 인구가 80%를 차지했었다는 연구도 있고, 아제르바이잔 측의 연구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도 1830년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65%를 차지했다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주가 지속되면서 1880년에야 아르메니아인들이 53%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지원 속에서 아르메니아인의 유입과 정착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이들 지역에서 밀려나면서 인구의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주장까지 보고 나면 문제는 수렁으로 빠진다. 아르메니아나 아제르바이잔이나 모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더 깊이 내려가면 현재의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고대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했던 지역이 맞다. 그런데 그것은 기원전후까지 거슬러 내려가야 한다. 기원전 190년에서 서기 428년까지 지속한, 흔히 대()아르메니아라고 불리는 아르메니아 왕국(Kingdom of Armenia)의 영토였다.

 

그러나 이후 아르메니아는 천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동로마, 페르시아, 셀주크 투르크, 몽고, 오스만, 이란(페르시아) 등의 지배를 받아왔다. 1080년에서 1375년 자치를 인정받아 국가를 운영하긴 했지만 이후 러시아가 지배하기 시작한 19세기 초반까지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이란) 제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아마도 이 시기에 무슬림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아르메니아인들보다 더 많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영토에 대한 연원을 쫓아가는 것은 이렇듯 한이 없고,

어느 시기를 기준으로 봐야하는가의 문제는 또한 너무도 주관적이다.

 

정작 중요한 사실은 이 비극이 이미 이성을 넘어 감정의 문제로 넘어갔다는 데에 있다.

두 민족 간의 감정의 골은 이미 패일대로 패였다.

 

 

깊이 패인 감정의 상흔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에 국립 역사 박물관이 있다. 국립이라곤 하지만 입구조차도 찾기 힘든 박물관이었던 곳으로 기억한다. 추적추적 눈이 내리던 날, 아제르바이잔의 역사가 궁금해서 찾아간 역사 박물관에서 또 다른 비극들과 마주쳐야만 했다.

 

 

 

수도 바쿠의 국립 역사 박물관, 가장 큰 역사박물관일지 모르는 이곳 전시 내용의 상당 부분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기간 일어난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아제르바이잔인 학살들로 채워져 있었다. 특히, 전쟁 기간 가장 큰 민간인 학살로 남은 1992년의 호잘리(Khojaly) 집단 학살에 대한 기록이 많았다.

 

 

 

박물관을 나와서 곧장 숙소로 달려가서 자료를 찾았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박물관이니 아제르바이잔 입장에서 주로 서술되었을 터, 아르메니아의 입장과 사실이 궁금했다. 민간인 학살이 아르메니아 일방에 의해서만 자행되었다면 전쟁의 원인이 어떻든 간에 이 전쟁의 책임을 아르메니아에 돌려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 학살은 아르메니아 일방에 의해서만 주도되지 않았다. 전쟁 기간 양 민족 간에는 상대방에 대한 무수한 폭력과 학살로 점철되었다.

 

1921년 스탈린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제르바이잔 편입을 결정했지만 소비에트 연방 시기에는 갈등이 수면 위로 부상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 때문이다.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이 흔들리기 시작한 1980년대 중순부터다.

 

1985년 소련에서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글라스노스트(glasnost)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로 상징되는 개혁개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이에 자극받은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유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 지역에 압도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도 이를 지지했음은 물론이다.

 

1988222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아제르바이잔과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분리를 공식적으로 불허하자 참았던 불만은 폭발하고야 말았다.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고, 이에 반발하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시위도 격화되었다.

 

이 시기에 첫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첫 학살은 아르메니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에 의한 것이었다. 1988227일에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두 명의 아제르바이잔 청년들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피살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에 격분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27일과 28일 양일 동안 아제르바이잔의 숨가이트(Sumgait)라는 도시에서 그곳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보복 폭력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아르메니아인 32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8월에는 다시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더 큰 학살이 일어났다.

 

숨가이트와 바쿠의 비극은 양국 상호 간에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양국에서 상대방 민족에 대한 폭력이 이어져 많은 희생자를 냈고, 상대방 국가에 살던 수십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의 필사적인 탈출이 이어졌다.

 

199192일 아르메니아의 지원을 받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 Republic, NKR)을 선포하고, 군대를 조직하면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1991년 말 전쟁의 양상은 전력상 우위에 있던 아제르바이잔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했다. 아제르바이잔 군은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수도를 압박하고 있었다.

 

1992년에 들어서면서 정세에 변화가 생겼다. 1991년 말 소련 붕괴로 철수했던 러시아군이 다시 이곳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아르메니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직후 독립을 주장했던 구소련의 연방 공화국들이 다시 러시아를 중심으로 국가연합체제, 즉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을 구성했다. 여기에 아르메니아는 참여 했지만 당시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의 관계를 도모하면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92년 정세 변화에 따라 아르메니아의 공세가 강화될 무렵 가장 큰 민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났다. 1992225일에서 26일로 넘어가는 저녁의 일이었다. 일단의 아르메니아 무장 조직과 이들을 지원하는 러시아 군대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 호잘리(Khojaly)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아제르바이잔인 민간인 613명이 죽고, 487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275명이 인질로 끌려갔다. 이것이 호잘리 대학살이다.

 

비극이 비극을 낳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전쟁은 1994512일 휴전 협정으로 끝을 맺었지만 전쟁 기간 깊어진 감정의 상흔은 치유될 길이 없었다.

 

 

아제르바이잔 바쿠를 떠나는 날, 카스피 해(Caspian Sea) 해안 공원의 높다란 깃대에 걸려 있는 아제르바이잔 국기가 전과 달라 보였다. 한 기폭만큼 내려온 조기였다. 조기와 함께 긴 검은 리본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분명 애도의 날로 보였다. 급히 확인을 해보니 그날이 바로 226, 호잘리 비극이 일어났던 그날이었다.

떠나는 여행자의 발걸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조기
평상시 모습

아제르바이잔 바쿠 14: 바쿠(Baku)를 떠나는 날, 아제르바이잔 역사의 비극적인 날이기도(20190226)

 

D+104, 아제르바이잔 바쿠 14: 바쿠(Baku)를 떠나는 날, 아제르바이잔 역사의 비극적인 날이기도(20190

오전 11시 반쯤 느지막이 체크아웃을 했다. 바쿠(Baku)를 떠나 조지아(Georgia) 트빌리시(Tbilisi)로 가는 기차는 저녁 8시 40분이다. 시간이 무척 많이 남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비가 후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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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 바쿠를 떠나는 여행자는 비극의 또 다른 당사자인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으로 간다. 비극은 여행자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서로 국경을 봉쇄하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르메니아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두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조지아(Georgia)로 갔다가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가야 한다.

 

바쿠를 떠나며 여행자는 기원한다. 다음에 올 때는 바쿠에서 바로 예레반(Yerevan)으로 갈 수 있게 되기를.

 

 

그런데....... 아르메니아에 간 여행자는 훨씬 더 비극적인 역사와 마주해야 했다.

 

캅카스의 비극 2: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

 

캅카스의 비극 2: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

2020년 7월 중순에 시작한 아르메니아(Armenia)와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의 무력 충돌이 수개월째 지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며칠간의 짧은 무력 충돌로 끝날 줄 알았는데 전면전으로 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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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