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캅카스(코카서스)의 비극 3: 역사의 아이러니 아라랏산(Mt. Ararat) 그리고 ‘아르메니아 문제(Armenian Question)’

경계넘기 2020. 11. 17. 12:15

 

언덕 중턱의 코르비랍(Khor Virap) 수도원 뒤편,

작은 언덕 정상의 바위에 걸터앉아,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아라랏산(Mt. Ararat)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정상부엔 여전히 눈으로 덮인 아라랏산의 두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아라랏산과 나 사이에는 평평한 대지만이 있어 가릴 것이 없다.

걸어도 반나절이면 닿을 것 같다.

 

 

 

아르메니아(Armenia)의 수도 예레반(Yerevan)에서 남쪽으로 30km 남짓 내려오면 코르비랍 수도원이 있다. 코르비랍 수도원은 수도원 자체도 좋지만 아르메니아에서 아라랏산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아라랏산(Mt. Ararat).

 

구약성경 창세기의 노아와 방주 이야기에서 대홍수 끝에 노아의 방주가 닿았다는 바로 그 산이다. 성경대로라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낮은 산은 아니다. 높이가 5,137m에 이른다. 만년설을 가진 산이자, 언제 화산이 떠질지 모르는 활화산이다.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두 개의 원추형 봉우리를 가지고 있다. 높은 봉우리가 큰() 아라랏(Greater Ararat)이고 낮은 봉우리가 작은() 아라랏(Little Ararat)이다. 코르비랍에서 바라보면 오른쪽 앞에 있는 것이 큰 아라랏이고 왼쪽 뒤편에 있는 것이 작은 아라랏이다.

 

서기 301년에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가 아르메니아다. 천년이 훌쩍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이민족들, 특히 이슬람의 지배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잃지 않았던 아르메니아인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아라랏산은 성산(聖山)이다.

 

 

 

 

D+118, 아르메니아 예레반 13: 코르비랍(Khor Virap) 수도원에서 바라본 아라랏산(Mt. Ararat)(20190312)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Yerevan)의 웬만한 언덕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성스런 산으로 추앙하는 아라랏산(Mt. Ararat)을 볼 수 있다. 예레반의 랜드마크인 캐스케이드(Cascade)에서도 물론인데, 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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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의 중심 시가지를 설계한 사람이 있다.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 러시아 사람이지만 아르메니아를 사랑해서 1923년 아르메니아로 이주한 이후 죽을 때까지 아르메니아에서 살았다.

 

1828년 러시아가 페르시아 제국을 몰아내고 아르메니아를 접수했다. 이후 러시아는 예레반의 이슬람 잔재를 제거하면서 점진적인 재건을 시도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시가지의 개발은 1920년대에 이루어졌다. 그때 도심 시가지의 설계를 담당한 사람이 알렉산더 타마니안이다.

 

 

알렉산더 타마니안 동상과 캐스케이드

 

타마니안은 예레반을 설계하면서 예레반 시내 어느 곳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인 아라랏산을 볼 수 있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예레반의 중심 시가지는 북쪽 한 끝에 예레반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인 캐스케이드(Cascade)를 두고 남쪽을 향해 커다란 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맑은 날 캐스케이드 위에서 보면 멀리 아라랏산이 보이는데 마치 예레반 시가지가 아라랏산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라랏산이 예레반 시가지를 굽어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레반에서 본 아라랏산(출처: Wikipedia English)

 

D+106, 아르메니아 예레반 2: 눈 내리는 예레반(Yerevan)(20190228)

눈을 떠 보니 아침 9시다. 이때까지 한 번도 깬 적이 없었으니 간만에 꿀맛 같은 잠을 잤다. 세상모르고 잤으면 잘 잔 것이지. 어제 기차에서 코 엄청 골아대는 친구가 가장 큰 역할을 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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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아라랏산은 아르메니아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산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아르메니아에서 아라랏산을 갈 수가 없다.

 

아라랏산이 아르메니아가 아니라, 아르메니아와 서로 국경을 봉쇄하고 있는 터키의 영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성산이 이슬람 국가에 있다.

 

 

 

아르메니아 문제이야기
Armenian Question

 

왜 아르메니아인들은 남의 땅에 있는 아라랏산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애달아하는 것일까? 단지 성경에 등장했다는 이유로?

 

 

아르메니아 민족의 기원: 아라랏산의 아르메니아 고원
Armenian Highlands

 

우리 민족의 건국 신화인 단국신화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백두산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과 나라의 기원이 백두산이란 의미다.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자 영산(靈山)으로 불리는 이유다.

 

아르메니아인의 기원도 아라랏산 주변의 고원 지대다. 터키가 있는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의 동부로 현재 대부분 터키의 영토다. 지금도 공식적인 지명으로 이곳을 아르메니아 고원(Armenian Highlands)이라 부른다. 물론 터키는 다른 지명을 쓴다.

 

 

아르메니아 고원 (출처: httpwww.armenophile.comimg-detail677armenian-highlands)

 

아르메니아 고원에 살던 부족들이 아르메니아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무렵이다. 흩어져 살던 이들이 기원전 331년에는 아르메니아 왕국(Kingdom of Armenia)을 세웠다. 이를 대아르메니아 왕국(Kingdom of Greater Armenia) 또는 대아르메니아(Greater Armenia)라고도 부른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의 통일 왕국으로 발전하면서 서기 428년까지 이어졌다. 티그라네스 2(Tigranes the Great, 95-55 BC) 때에는 로마(Rome) 동부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로 성장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생각하는 고토(故土)가 이때를 바탕으로 한다.

 

 

아르메니아 왕국(출처: Wikipedia English)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 한가운데 아라랏산이 있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숱한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 속에서도 아라랏산과 아르메니아 고원을 지키며 살았다.

 

이렇듯 아라랏산은 아르메니아 민족과 국가의 기원으로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항상 함께 했다. 종교를 떠나서도 아라랏산이 아르메니아의 성산(聖山)이자 영산(靈山)인 이유다. 우리의 백두산처럼.

 

 

 

아르메니아의 동서 분단

 

아라랏산은 어떻게 터키의 영토가 되었을까?

 

아르메니아 왕국을 통해서 통일 국가를 이루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후에도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야 했다. 동서의 교차로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고원의 지정학적 위치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페르시아 제국(Persian Empire, 사산 왕조),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 셀주크 제국(Seljuk Empire), 몽골 제국(Mongol Empire),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페르시아 제국(이란) 그리고 러시아와 소련으로 이어지는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16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 경쟁적으로 아르메니아 고원에 영향을 미치면서 아르메니아가 동서로 갈라져 지배받는 상황이 생겼다.

 

16세기 초 사파비(Safavid)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이 아르메니아의 전 영토를 지배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동쪽으로 외연을 확장하면서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20여 년 간의 전쟁 끝에 16세기 중엽 두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동서로 나눠서 지배하기로 한다. (西)아르메니아(Western Armenia)는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Eastern Armenia)는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했다.

 

아라랏산이 있는 아르메니아 고원은 대부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서아르메니아에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에 있던 동아르메니아는 이후 러시아,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해 현재의 아르메니아 공화국(Republic of Armenia)이 되었지만, 서아르메니아는 지금까지 그대로 터키의 영토로 남아 있다.

 

 

 

아르메니아 문제(Armenian Question)’의 부상

 

왜 서아르메니아는 독립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터키의 영토로 남아 있는 것일까?

 

오스만 제국이 강해서?

아니면 서아르메니아인들의 독립 의지가 없어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격동의 근현대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19세기 통계에 의하면 당시 오스만 제국 안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은 3백만 명 조금 못 미쳤다고 한다. 현재 아르메니아의 인구가 3백만이니 결코 적지 않은 인구다. 주로 서아르메니아 지역인 아나톨리아(Anatolia) 동부에 살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 등의 도시는 물론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지역 곳곳에 살고 있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 분포(출처: Wikipedia English)

 

다민족, 다종교의 거대 오스만 제국에서 기독교 아르메니아인들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졌다고 한다. 유대인들처럼 상술에 능했던 아르메니아인들 중에는 상업, 무역, 공예 등에 종사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제국 내 상권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차별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국 안에서 아르메니아인들과 같은 기독교인들은 2등 신민 취급을 받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무슬림에 비해 과도한 세금, 지역 무슬림 유지 등에 의한 토지 강탈 등에 시달렸고, 제도적 차별도 있어서 법정에서 무슬림에 반하는 비무슬림의 증언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살고 있었던 아나톨리아의 동부, 즉 서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더욱 심했다. 특히 치안이 불안한 이 지역에서는 무슬림인 쿠르드족(Kurd)이나 체르케스족(Circassia) 무리들에 의한 약탈이나 습격에도 자주 시달렸다. 재산은 물론이고 생명을 위협당하는 경우도 흔했다.

 

 

서아르메니아로 추정되는 오스만 제국의 6개 아르메니아 지역(출처: Wikipedia English)

 

쿠르드족이나 체르케스족은 오스만 제국이 서아르메니아 지역에서의 아르메니아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주시킨 무슬림 민족들이다. 이들에게 제국의 동쪽 국경을 수비하는 민병대의 역할을 맡겼는데 정식 군대가 아닌 관계로 일정한 급여가 지급되지 않아서 약탈로 생계를 잇는 경우가 많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서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약탈 대상은 기독교도 아르메니아인들일 수밖에 없었다. 약탈자들에 대한 처벌이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안전 대책은 전무했다.

 

오스만과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무슬림과 힘들게 공존하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9세기 유럽은 제국주의가 득세하면서 자국의 영토 확장을 위한 경쟁과 갈등이 심화되고, 이해타산에 따라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이합집산이 쉼 없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이와 함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전 유럽 대륙을 불태우고 있었다.

 

19세기 유럽의 변화는 서서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움직임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 프랑스 등에 뒤쳐졌던 러시아도 18세기 초 표트르 1(Peter the Great) 때부터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정규군을 창설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 경쟁에 뛰어들었다. 유라시아 북단에 위치한 러시아는 당연히 남쪽을 향했고, 여기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러시아가 영토 확장에 들어갈 무렵 오스만 제국은 크림 반도를 포함한 흑해 북부 연안, 발칸 반도(Balkans) 그리고 캅카스(Kavkaz) 남서부를 지배하고 있었고, 페르시아 제국은 캅카스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흑해와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과의 격돌은 그래서 불가피해 보였다.

 

19세기 들어 러시아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오스만 제국과의 일련의 전쟁들에서 승리하면서 크림 반도와 흑해 북부 연안을 확보한 러시아는 19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캅카스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두 차례의 전쟁을 일으켰다. 1804년에서 1813년까지의 1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Russo-Persian War) 그리고 1827년에서 1828년까지의 2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모두를 승리로 이끌면서 러시아는 캅카스에서 페르시아를 완전히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페르시아 지배 아래 있었던 캅카스 남부의 동아르메니아가 러시아로 완전히 넘어갔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와 같은 기독교 국가였다.

 

뒤이어 바로 오스만의 지배 아래 있던 그리스가 독립 전쟁(1828-1829)을 일으켰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그리스와 동맹을 형성하여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전쟁은 동맹군의 승리로 끝나고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했다. 그리스 역시 기독교 국가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오스만 제국이 흔들리면서 동아르메니아가 기독교 러시아의 지배로 들어가고, 기독교 그리스가 독립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오스만 제국에서 차별 받던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도 조금씩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이 싹 트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아르메니아인들이 유럽의 기독교 열강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아르메니아의 문제가 서서히 국제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국제 사회에 아르메니아 문제가 급격히 부상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역시 러시아에 의해 일어났다. 러시아-투르크 전쟁(Russo-Turkish War, 1877-1878)으로 러시아가 발칸과 캅카스 두 지역에서 동시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발칸에서는 러시아가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과 정교회 연합을 형성하여 오스만과 싸웠고, 캅카스에서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이 바로 아나톨리아 동부로 진격해 들어갔다.

 

 

발칸에서의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출처: Wikipedia English)
캅카스에서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출처: Wikipedia English)

 

전쟁은 러시아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산스테파노 조약(Treaty of San Stefano)으로 발칸에서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립을 얻었고, 서아르메니아를 포함하는 아나톨리아 동부도 러시아가 할양 받았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축복 같은 소식이었다. 러시아군은 해방군 같았고, 동아르메니아와 함께 서아르메니아도 같은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에 들어가면서 발칸의 국가들처럼 동아르메니아와 서아르메니아의 통합과 독립을 기대했다.

 

기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알 수 없었던 당시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분할 통치는 국제 정치에서 강력한 상대의 힘을 분산시켜 전쟁과 협상을 유리하게 가져가거나 지배 지역의 피지배자들을 분열·적대시킴으로써 통치를 보다 용이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외교 전략이자 통치 전략이다.

 

18, 19세기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유럽의 기독교 열강들은 방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견제와 영향력 약화를 끊임없이 획책했다. 그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 중의 하나가 다민족, 다종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 내에서 민족적, 종교적 분열과 대립을 야기하는 분할 통치 전략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분할 통치 전략에 가장 유용한 민족이 바로 아르메니아인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기독교인들로서 이슬람 오스만 치하에서 차별과 핍박을 받고 있었고, 이미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어서 군불만 조금 지피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아르메니아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처우 개선을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빌미로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고 압박하기에 더욱 용이했다.

 

여기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가 끊임없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루고 있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발칸뿐만 아니라 캅카스 그리고 아나톨리아에서 끊임없이 같은 기독교 민족들을 자극했다.

 

캅카스에서는 19세기 페르시아를 밀어낸 러시아가 지배 지역의 통치를 용이하기 위해서 당시 남캅카스의 인구 구성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무슬림을 견제하고자 기독교 민족인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지원했다. 이는 지금도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Nagorno-Karabakh War)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아울러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동서 아르메니아가 통합된 대()아르메니아 건설을 약속하면서 동서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생각하는 대아르메니아(출처: Wikipedia English)

 

이러한 정지 작업 속에서 러시아는 1877년 발칸과 캅카스 두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른 것이다. 분할 통치 전략 덕분에 발칸에서는 러시아 주도로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과 함께 동방정교회 연합을 구성할 수 있었고, 캅카스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독립된 대아르메니아 건설을 꿈꾸며 러시아군에 자원입대해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동아르메니아는 물론이고 서아르메니아인들도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다. 그들에겐 민족 해방 전쟁이었다. 그만큼 러시아군들보다 더 열심히 싸웠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렇게 탈환한 아나톨리아 동부의 서아르메니아였다.

 

러시아의 숨은 의도가 어찌 되었든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러시아군이 장악한 아나톨리아 동부의 할양이 확정되었을 때 아르메니아인들의 기쁨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예상치 못한 냉혹한 국제 정치의 먹구름이 그들의 희망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안전 보장과 권익 증진을 지지한다던 서유럽 기독교 열강들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이번에는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서유럽 열강들은 베를린에서 회담을 갖고 산스테파노 조약의 수정을 러시아에 요구했다. 핵심은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의 러시아 영향력 축소에 있었다. 여기에는 아나톨리아 동부에서의 러시아군 철군도 포함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다급해졌다. 러시아군이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철군하면 서아르메니아는 다시 오스만 지배 아래도 들어가고, 아르메니아의 통일과 독립도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대표단을 베를린에 보내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협상국들에게 자신들의 의지와 요구를 이해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1907년 을사늑약(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등의 헤이그 밀사를 파견했던 일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아르메니아나 조선이나 냉혹한 국제 정치 현실에서 힘없는 민족이 설 자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없었다.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갈 것이 우려되는 대아르메니아 건설에 대해 영국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산스테파노 조약을 수정한 베를린 조약(Treaty of Berlin)이 체결되었다.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러시아군은 철군하기로 했으며 철군과 함께 서아르메니아 독립은커녕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약속한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안전과 개혁도 유명무실화 되었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노력은 한 달간 진행된 베를린 회담에서 유럽 열강들 사이에 아르메니아 문제가 급부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제는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안전과 개혁을 넘어 대아르메니아 건설의 문제가 당시에 중요한 내용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아르메니아 문제(Armenian question)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고유 명사 아르메니아 문제(Armenian Question)’가 되었다.

 

그러나 다시 홀로 남겨진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남은 것은 배신자와 분열주의자라는 낙인과 보복뿐이었다.

 

오스만의 보복은 잔인하고 처절했다. 1894년부터 수십 년에 걸친 3차례의 대학살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특히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일어난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15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캅카스(코카서스)의 비극 2: 나치 유대인 학살의 교본,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의 수도 바쿠(Baku)에서 1988년에서 1994년에 있었던 아르메니아(Armenia)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Nagorno-Karabakh War)을 처음 알았고, 호잘리(Khojaly)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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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 소수민족의 보호와 개혁을 주장했던 서유럽 기독교 열강들이나 서아르메니아의 독립과 대아르메니아의 건설을 약속했던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렇게 서아르메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끝나지 않은 아르메니아 문제(Armenian Question)’

 

아르메니아 문제는 역설적으로 아르메니아 문제가 아르메니아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뭇가지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망신창이가 된 연처럼 약소민족 아르메니아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망신창이가 되어왔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라랏산을 동경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성산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라랏산이 그들이 겪었던 아픔과 설움의 ()’과 통일된 아르메니아 건설의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라랏산을 보면서 한에 울고, 희망에 웃는다.

 

그래서 아르메니아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제 아르메니아 문제는 서아르메니아의 영토 회복에 더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대한 터키 정부의 인정과 사과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영토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서아르메니아 즉 아나톨리아 동부는 터키가 16세기 중엽 이래 5세기 가까이 그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5백년을 살아온 땅에서 터키인들을 내쫓을 권한은 없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아르메니아 문제에 포함되면서 학살에 대한 터키의 인정과 사과 역시 훨씬 복잡해졌다. 아르메니아 문제에 영토 수복과 과거사가 같이 묶여 있는 한 터키가 대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하자마자 바로 영토 반환 문제가 따라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르메니아가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주변국들에게 기대거나 의지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싶다.

 

아르메니아인들의 그림에 보면 아라랏산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의 무용과 발레에도 무대 배경에 아라랏산이 등장한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알고 나면 그 그림들과 무용들이 달리 보인다.

 

 

마르티로스 사리안 작품
마르티로스 사리안 작품
아르메니아 전통무용(출처: Wikipedia English)

 

D+111, 아르메니아 예레반 7: 예레반의 한 미술관(Martiros Saryan House-Museum) 그리고 허물어진 성(Erebuni

아침을 먹고 있는데 슬로바키아 친구인 패트릭이 오늘 어디 갈 예정이냐고 묻는다. 코카서스(Caucasus)에 와서 아침에 일어나자 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늘을 살피는 일이다. 날씨가 하도 변덕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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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비납 수도원의 작은 언덕에서 아라랏산을 보다보면 수도원 바로 아래 국경 철책선이 선명하게 보인다. 가까이 있어도 갈 수 없어 더 아련한 곳.

 

아픔과 분단을 겪었던 민족들만이 느끼는 이 보인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