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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비극 1-2: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2

경계넘기 2021. 12. 25. 15:00

 

발칸의 비극 1-1: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1

 

발칸의 비극 1-1: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1

발칸의 비극 1-1: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1 2021년 11월 어느 날, 신문에 이런 기사들이 떴다. “26년 ‘불안한 평화’ 깨지나…10만 명 숨진 ‘인종청소’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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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비극 1-2: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2

 

 

1.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Slovenian War of Independence, 1991)

 

 

 

10일 전쟁(Ten-Day War)이라고도 부른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시작은 슬로베니아(Slovenia)에서였다.

 

1991625,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다음날인 626일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정확한 명칭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Yugoslav People's Army)이 전격적으로 슬로베니아의 국경을 넘었다. 당시 구유고 연방군은 세르비아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슬로베니아 방위군은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연방군을 맞아 싸웠다. 수많은 크로아티아 시민들이 자신들의 차량으로 연방군의 이동을 막아주기도 했다. 수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출처: wikipedia)

 

그런데 호기로운 작전 전개와는 달리 전쟁 개시 열흘 만인 77일 구유고 연방은 슬로베니아와 전격적으로 협정을 맺고 전 전선에서 바로 연방군을 철수시켰다. 작전 개시 10일 만에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한 셈인데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을 10일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구유고 연방에서 정규 정예 병력은 연방군이었고 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에는 기껏해야 우리의 동원 예비군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역방위군과 국경수비대 그리고 경찰 병력 밖에 없었다. 독립을 선언하기 전에 미리 병력과 무기를 어느 정도 확보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규 연방군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유고 연방군이 전쟁 개시 단 10일 만에, 그것도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만으로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병력을 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인구의 90% 가까이가 슬로베니아인이었기에 당시의 국제 정세에 비추어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막을 명분이 약했다는 이유도 제시되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크로아티아에 있었다.

 

 

2.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Croatian War of Independence, 1991-1995)

 

 

 

1991625일 슬로베니아와 함께 크로아티아도 독립을 선언했다.

 

크로아티아 전쟁은 슬로베니아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인구의 90% 이상이 슬로베니아인이었던 슬로베니아와 달리 크로아티아에는 세르비아계도 상당수(12.2%) 살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독립 움직임에 세르비아계는 거칠게 저항했고, 급기야 반군을 조직해 무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계 반군을 세르비아와 구유고 연방군이 지원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크로아티아 (출처: wikipedia)

 

199177일 슬로베니아와의 전쟁을 서둘러 종결한 구유고 연방군은 세르비아계 반군과 함께 바로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슬로베니아와의 전쟁을 단 10일 만에 서둘러 종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세르비아계가 거의 없는 슬로베니아보다는 세르비아계가 많이 사는 크로아티아에 화력을 집중하려는 의도였다.

 

초기의 전세는 연방군과 세르비아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크로아티아군이 압도적인 화력의 연방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연방군은 참전 한 달 만에 크로아티아 영토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동년 12월에는 점령 지역을 바탕으로 세르비아계의 국가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epublic of Serbian Krajina)이 수립되었다.

 

 

1991년 구유고 연방군의 크로아티아 공세 (출처: wikipedia)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출처: wikipedia)

 

인명 피해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연방군의 작전은 군병력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은 대대적인 포격이 중심이었다. 인명 피해가 급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 문화유산의 파괴도 심각했다. 1991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두브로브니크(Dubrovnik)가 연방군의 포격으로 성벽 내 건물 56%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두브로브니크 포격 (출처: wikipedia)

 

급기야 집단 학살도 발생했다.

 

집단 학살은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인 상호 간에 일어났다. 하지만 연방군과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 중에서 특히 많았다. 점령 지역에서 상대방 민족들을 추출하기 위해 집단 학살, 집단 강간, 강제 추방 등을 조직적으로 벌이면서 인종 청소(ethnic cleaning)’라는 신조어가 나오기까지 했다.

 

199212일 유엔(UN) 주도 아래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휴전으로 들어갔다. 세르비아계가 점령한 지역을 따라 전선은 고착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휴전과 함께 연방군이 바로 크로아티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종결하려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보스니아 전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방군이 물러나고 크라이나 공화국군만이 남자 휴전 상태에서도 산발적인 크로아티아군의 반격이 이어졌다. 그러다 1993년에 들어서는 크라이나 공화국에 대한 크로아티아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감행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의 격화와 국제 사회의 압박으로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반군과 크라이나 공화국군에 대한 세르비아의 지원도 여의치 않았다.

 

1995년에 들어 세르비아계 점령 지역들이 속속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탈환되는 듯싶더니 동년 1112일 협정이 체결되고 전쟁이 종결되었다. 협정에 따라 그때까지 남아 있던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모든 지역은 크로아티아로 반환되었다.

 

크로아티아 전쟁 초기인 19919월에는 마케도니아도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와 연방군이 개입하지 않고 사실상 평화적으로 독립이 인정되었다.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이 한창이라 세르비아가 개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의 입장에서는 일단 크로아티아와의 급한 불을 끈 다음 두고 보자는 심산이 아니었을까.

 

 

다음 글에 이어서

 

 

발칸의 비극 1-3: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3

 

발칸의 비극 1-3: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3

발칸의 비극 1-3: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3 3. 보스니아 전쟁 (Bosnian War, 1992-1995) 보스니아 전쟁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서도 가장 처참하고 추악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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