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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비극 1-3: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3

경계넘기 2021. 12. 25. 15:33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은 사라예보의 관공서 건물

 

발칸의 비극 1-1: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1

 

발칸의 비극 1-1: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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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비극 1-2: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2

 

발칸의 비극 1-2: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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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비극 1-3: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의 악몽(惡夢), 유고슬라비아 전쟁 3

 

 

3. 보스니아 전쟁
(Bosnian War, 1992-1995)

 

 

 

보스니아 전쟁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서도 가장 처참하고 추악한 전쟁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이하 보스니아)는 크로아티아보다 민족과 종교 구성이 더 복잡하다. 1992년 전쟁 발발 당시만 해도 보스니아의 민족 구성은 무슬림 보스니아인이 44%, 정교도 세르비아계가 33.5% 그리고 로마가톨릭 크로아티아계가 17%을 차지하고 있었다.

 

 

1991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분포 (출처: wikipedia)

 

전쟁의 양상은 크로아티아와 비슷했지만 훨씬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99233일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계가 이에 반발해 46일 자체적으로 세르비아계의 국가인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을 선포하고, 곧 바로 세르비아 민병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전쟁과는 달리 연방군이 직접 전쟁에 개입하기보다는 스릅스카 정부군과 세르비아 민병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역시나 전쟁 초반에는 연방군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가 우세했다.

 

 

보스니아 전쟁 중 사라예보 (출처: wikipedia)
1992~1995 세르비아의 전세 (출처: wikipedia)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더 조직적이고 잔인한 집단 학살과 인종 청소가 일어났다.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주도 아래 비무장 무슬림 보스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인종 청소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무슬림 보스니아인에 대한 잔혹한 집단 학살, 여성들에 대한 집단 강간과 성폭력 그리고 강제 추방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때때로 크로아티아계에 의한 보스니아인 집단 학살이 발생하기도 했다.

 

 

보스니아 전쟁에서 발생한 집단 학살 (출처: srebrenica.org.uk)

 

1995년 들어 세르비아계가 수세에 몰리면서 보스니아인에 대한 집단 학살과 인종 청소는 더욱 극심해지고 악랄해졌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스레브레니차 학살(Srebrenica Massacre)이었다. 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동부의 작은 도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장악한 지역에 있었지만 당시 유엔 평화유지군이 지키고 있는 안전지대였다. 하지만 19957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도시를 장악하고 미쳐 도시를 떠나지 못한 만여 명의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일으켰다. 당시 이 도시를 지키던 네덜란드 유엔 평화유지군은 자신들의 기지로 피신한 시민들을 민병대에 내주는 일까지 벌어졌다.

 

유엔은 무력했고,

유럽에서 집단 학술과 인종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나토(NATO)와 미국 등 서방 세계의 대응은 무척이나 느렸다.

 

 

보스니아 전쟁의 집단 학살 (출처: wikipedkia)
보스니아 전쟁의 집단 학살 (출처: wikipedia)
스레브레니차 추모 공원 (출처: 연합뉴스)

 

1995830일 드디어 나토의 공습이 감행되었다.

 

개입을 주저하던 서방 국가들도 더 이상 잔혹한 집단 학살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어지는 한 달 간의 공습으로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19951214일 데이튼 협정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협정에 따라 스릅스카 공화국은 보스니아에 합병되었고 보스니아는 독립했다.

 

하지만 보스니아 전쟁은 잔혹한 집단 학살과 인종 청소로 10만 여명의 희생자를 낳은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전쟁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4. 코소보 전쟁
(Kosovo War, 1998-1999)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마지막 4번째 전쟁.

 

세르비아의 남서쪽에 위치한 코소보에서도 독립 움직임이 일어났다. 코소보는 무슬림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아니라 세르비아에 병합되어 있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독립 요구에 세르비아는 더 강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1995년부터는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 해방군(KLA, Kosovo Liberation Army)을 조직하면서 세르비아 경찰과의 산발적인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코소보 (출처: bbcnews)

 

또 다시 불거진 인종 청소와 집단 학살

 

무력 충돌의 양상이 커지자 19985월 세르비아는 코소보 해방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계가 주축인 연방군은 비무장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을 벌여 조직적인 집단 학살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조직적인 강간과 성폭력을 광범위하게 일으켰다. 격분한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 해방군에 대규모로 참여하면서 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코소보 전쟁 (출처: valourcanada)

 

미국과 유럽연합은 전쟁 개시 한 달 만에 세르비아를 맹비난하면서 코소보에서의 세르비아군 철수와 집단 학살 중단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와 함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다양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이를 무시하고 전쟁과 학살을 지속하자 이듬해인 1999324일 나토가 당시 신유고 연방을 구성하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나토의 공습은 611일까지 총 78일간 진행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한 달 간의 공습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던 터라 규모가 더 작은 코소보 전쟁에서는 일주일 정도의 공습으로도 전쟁이 종결되리라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전 전쟁에서 내공이 쌓였던 것일까 세르비아의 저항은 완강했다. 신유고 연방의 한쪽을 이루던 몬테네그로는 몇 번의 공습으로 손을 들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를 여행하다 마주한, 공습 맞은 옛 세르비아의 국방성과 육군 본부 건물들은 그때 공습을 받은 것이다.

 

 

나토 공습 (출처: wikipedia)

 

전쟁은 1999625일 공식 종전되었다.

 

전쟁으로 세르비아는 코소보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 한동안 코소보는 유엔 통치 아래의 자치 지역으로 남았다가 2008년에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99년 모든 전쟁이 종식되고,

2006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고,

2008년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 남긴 숱한 상처는 세르비아뿐만 아니라 독립 국가들 곳곳에 채 아물지 못하고 여전히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는 이제 역사에 묻혀서 더 이상 인류사에 등장하지 않을 줄 알았던 잔혹한 집단 학살의 부활을 지켜봤다. 인간의 집단 이성은 눈앞의 이익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울러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국제사회에 전쟁 범죄와 같은 인권 침해에 대한 인도적 개입의 문제를 남겼다. 국가 주권과 인도적 개입의 문제는 지금도 미얀마 사태와 중국의 신장 위구르 인권 탄압 등의 이슈에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여하튼 발칸에 다시 전쟁의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니 가슴 아프다.

다시 가고픈 발칸인데.......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