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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비극 2-2: 발칸에 떠도는 집단 학살의 악령들, 우스타샤(Ustaša)와 체트니크(Chetnik) 2

경계넘기 2022. 1. 22. 17:54

체트니크(Chetnik) (출처: Wikipedia)

발칸의 비극 2-1: 발칸에 떠도는 집단 학살의 악령들, 우스타샤(Ustaša)와 체트니크(Chetnik)

 

발칸의 비극 2-1: 발칸에 떠도는 집단 학살의 악령들, 우스타샤(Ustaša)와 체트니크(Chetnik)

발칸에 떠도는 집단 학살의 악령들, 우스타샤(Ustaša)와 체트니크(Chetnik)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Beograd). 도심을 걷다가 1999년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나토(NATO)의 공습을 받은 세르비아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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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에 떠도는 집단 학살의 악령들, 우스타샤(Ustaša)와 체트니크(Chetnik) 2

 

우스타샤에 대칭되는 세르비아의 조직도 있었다.

 

체트니크(Chetnik)라는 이름을 가진 무장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체트니크는 세르비아인을 집단 학살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우스타샤와 전투를 벌였다. 거기까지였다면 좋았겠지만 체트니크는 더 나아가 상응하는 보복으로 그들이 우위에 있는 지역에서 크로아티아인, 무슬림 보스니아인 등에 대한 집단 학살을 일으켰다.

 

 

우스타샤(Ustaša)
를 증오한 그러나 그들을 모방한 체트니크(Chetnik)

 

 

 

체트니크(Chetnik)

 

 

 

체트니크(Chetnik)는 세르비아 왕당파이자 민족주의 무장 집단이었다.

 

체트니크의 기원은 우스타샤보다 훨씬 앞섰다. 체트니크는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있을 때 그들에 저항하기 위해서 조직된 단체였다. 세르비아가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1912-13년의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세르비아 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1941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추축국들에 점령당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다시 조직되었다. 정식 명칭은 유고슬라비아군 체트니크 분견대(Chetnik Detachments of the Yugoslav Army)’. 2차 세계대전 초기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발칸을 지배한 독일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체트니크 깃발 (출처: Wikipedia)

 

독일에 대항하는 발칸의 무장 조직에는 체트니크와 함께 티토의 파르티잔(partisan)도 있었다.

 

그들은 독일군에 대응하여 공동 전선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체트니크와 사회주의 연방 건설을 목표로 하는 티토와는 간극이 멀어도 너무 멀었다. 나중에 체트니크는 티토의 파르티잔에게 힘이 쏠리자 오히려 이들을 견제하는 데에 힘을 쏟기도 했다.

 

 

티토와 파르티잔, 맨 왼쪽이 티토 (출처: Wikipedia)

 

독일군을 상대로 한 전투는 점점 회피하였다.

 

독일군의 잔혹한 보복정책 때문이었다. 독일군은 독일군 사상자 한 명 당 100, 부상자 한 명 당 50명의 민간인을 처형한다고 선포했다. 실례로 194110월에 있던 한 전투에서 독일군 10명이 죽고, 14명이 부상을 입자 독일군은 근방의 민간인 1,700명을 학살했다.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섰는데 자신들 때문에 마을이 몰살될 형편이니 독일군과의 전쟁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추축국인 이탈리아군, 독일군과도 협력 관계를 갖기도 했다.

 

 

체트니크와 독일군 (출처: Wikipedia)

 

대신 우스타샤와의 전쟁과 보복에 집중했다.

 

세르비아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을 자행하는 우스타샤를 상대로 보복 전쟁을 강화했다. 하지만 그들의 보복은 점차 우스타샤를 넘어 민간인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잔혹한 보복 학살

 

 

 

학살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학살을 일으켰다.

 

우스탸샤에 대한 보복과 응징이라는 명분 아래 체트니크는 우스타샤와 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체트니크는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는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마을을 불태웠다.

 

 

 

아울러 체트니크 역시 순수한 대세르비아를 만들려 했다.

 

단순한 보복 행위를 넘어 나치와 우스타샤와 마찬가지로 인종적으로 순수한 대세르비아(Great Serbia)를 만들겠다는 신념 아래 비세르비아인에 대한 인종 청소(ethnic cleaning)를 계획하고 단행했다.

 

체트니크는 우스타샤와 전혀 관련이 없는 보스니아의 무슬림과 공산당이 주도하던 파르티잔도 학살했다. 오히려 크로아티아인보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에 대한 학살이 더 많았다.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파르티잔도 학살했다. 파르티잔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과 심지어 동조자들마저 학살했다.

 

 

 

체트니크 집단 학살의 희생자는 대략 50,000명에서 68,000명에 이르고 대략 300여 개의 마을과 작은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체트니크의 잔혹한 만행에 전쟁 초기 그들을 지원했던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연합군은 그들에게 손을 떼고 파르티잔을 지원했다.

 

희생자의 수로 본다면 우스타샤의 학살과는 비교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한 보복을 넘어 그들 역시 피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자신들과 다른 민족과 그룹에 대한 학살에 나섰다는 점이다. 규모의 차이만 다를 뿐 그 의미와 결과는 같다.

 

 

되살아나는 집단 학살의 악령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집단 학살의 악령들도 사라졌다.

 

종전과 함께 상호 학살을 일삼았던 남슬라브 민족들은 티토의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세우고 다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다. 집단 학살의 전범들은 대부분 기소되어 처벌되었고, 발칸의 민족들은 하나의 유고슬라비아 민족이라는 유고슬라비즘(Yugoslavism)의 기치 아래 평화롭게 공존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발칸의 집단 학살 악령들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다.

 

 

구유고슬라비아 연방 (출처: Wikipedia)

 

21세기를 목적에 둔 1990년대 발칸에 다시 극우 민족주의가 분출했다.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1991년에는 구()소련마저 해체되자 구유고 연방도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평화롭게 해체의 수순을 밟았던 구소련과 동유럽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발칸에서는 폭력적 해체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라졌던 집단 학살의 악령들이 다시 발칸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구유고 연방을 구성하던 민족들에서 다시 극우 민족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티토 사후의 권력 공백기에 각 민족의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 추구에 몰두했다. 사회주의가 힘을 잃은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대중동원와 프로파건다의 수단은 배타적 민족주의였다. 정치지도자들은 자민족이 받은 역사적 피해의식을 강조하고, 자민족이 자행한 범죄와 혐오는 정당화하면서 배타적 극우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세비치(Milosevi Slobodan)와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Franjo Tudjman)이었다. 이들은 사라진 집단 학살의 악령들, 체트니크(Chetnik)와 우스타샤(Ustaša)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발칸의 도살자라 불리는 밀로세비치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에 의한 세르비아인 집단 학살을 강조했다.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인을 다시 학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조성하면서 세르비아인의 결속과 다른 민족들에 대한 배타와 혐오를 강화했다.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사상적 배경과 정치적 방식은 19세기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와 매우 유사했다. 그는 우스타샤의 만행을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자신들이 유럽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라는 종교적 쇼비니즘을 강조하면서 세르비아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를 강화시켰다.

 

 

 

투지만과 밀로세비치 (출처: wikipedia) 

 

극우 민족주의는 끝내 집단 학살의 악령을 부활시켰다.

 

1991년에서 1999년까지 8년간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죽었던 집단 학살의 악령들이 부활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에서는 체트니크가 다시 등장하면서 전쟁 기간 내내 잔인한 집단 학살과 잔혹한 인종 청소가 만연하였다. 덕분에 독립 전쟁이라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지난 세기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전쟁의 하나로 남았다.

 

그 중심에는 다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있었다. 이번에는 피해의식이 가장 강했던 세르비아가 가장 중심에 섰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집단 학살과 인종 청소의 책임을 전적으로 세르비아에게만 물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집단 학살 (출처: wikipedia)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집단 학살 (출처: wikipedia)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구유고 연방을 구성하던 슬로베니아(Slovenia),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 세르비아가 독립하고, 2006년에는 몬테네그로(Montenegro), 2008년에는 코소보(Kosovo)마저 독립하면서 구유고 연방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집단 학살의 악령들이 발칸을 배회하고 있다.

 

악령의 시발점이었던 크로아티아가 2013EU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크로아티아에는 극우 민족주의 우스탸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크로아티아에서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고, 인종적 혐오주의가 분출하면서 서유럽 국가들은 발칸에서 나치즘의 부활을 우려하고 있다.

 

 

우스타샤 깃발을 든 크로아티아 여성 대통령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Kolinda Grabar-Kitarović), 가운데 빨간 옷 (출처: TheTimesofIsrael)

 

세르비아 역시 세르비아 중심으로 발칸의 남슬라브족을 통일하겠다는 대세르비아(Great Serbia)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곳에도 체트니크의 옷자락이 나불거린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집단 학살과 인종 청소의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무슬림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이 여전히 긴장 관계를 형성하면서 불완전한 국가 체제를 지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가 다시 분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뒤에 세르비아가 있음은 물론이다.

 

 

사라예보에서 체트니크 복장을 한 세르비아계 (출처: BalkanInsight)

 

언제고 불씨만 떨어지면 악령들은 다시 발칸에서 칼춤을 출 것이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