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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기 1-1: 배경과 원인 1

경계넘기 2022. 1. 31. 12:45

 

 

우크라이나 위기 1-1: 배경과 원인 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경고음이 연일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급기야 며칠 전(2022.1.23)에는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관 직원들과 가족들에는 대피 명령을, 자국 시민들에는 철수 권고를 내렸다. 한국도 125일자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여행 경보 상향 조처를 취하면서 우크라이나 내 출국 권고 지역을 3개 주에서 12개 주로 확대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이동하는 러시아군(출처: abcnews)

 

20196월에서 7월 사이 나는 우크라이나에 있었다.

 

폴란드 크라쿠프(Kraków)에서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 리비우(Lviv)로 넘어왔다. 크라쿠프에서는 330km, 폴란드와의 국경에서는 8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러시아어로 리보프(L'vov)라고도 불리는 리비우는 작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곳에서 보름 넘게 지냈는데 원래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리비우 전경

 

리비우에 오래 머물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리비우에서 음악의 향연에 빠졌기 때문이다. 도착했을 때 한창 여름 클래식 페스티벌이 진행되고 있었다. 리비우 올드타운 초입에 있는 예쁜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 발레 등 매일 다른 클래식 공연이 올라왔다. 보통이라면 한 공연이 며칠씩 하고, 그나마도 공연이 없는 날이 부지기수지만, 페스티벌이라 5주 간 매일 다른 공연이 올라왔다. 여행 중 이런 기회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리비우의 공연 관람료는 무척이나 저렴했다. 재즈 페스티벌도 열렸다. 리비우 올드타운은 광장과 거리마다 재즈 공연과 거리음악가들의 버스킹 공연의 향연에 깊이 싸였다.

 

 

 

다른 하나가 우크라이나 동부로의 여행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수도인 키예프까지는 가볼 수 있었지만 키예프(Kiyev)를 가로질러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가르는 드네프르강(Dnieper River) 동편 너머로는 여전히 정치와 치안이 불안정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Annexation of Crimea) 그리고 러시아가 지원하는 돈바스 전쟁(Donbas War)의 여진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우크라이나의 동남부 지역, 특히 돈바스 지역은 한국 외교부의 여행 자제 지역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적어도 리비우에서는 그런 어두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평화롭고, 활기차고, 음악에 싸여있던 도시였다. 매일 오페라 하우스를 간 덕에 직원들도 나를 알아보고 간혹 좋은 자리가 비면 공연 시작 직전에 나를 불러서 좌석 업그레이드를 시켜주곤 했다. 리비우 덕분에 동부의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는 평화와 예술의 나라로 기억되었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우크라이나 동부에 다시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2021년 말부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 10만여 명의 전투 병력을 전진 배치했다고 한다. 전투 병력은 수백 대의 전차를 보유한 기갑부대, 포병 부대, 기계화 보병부대 등으로 구성된 정예 병력으로 알려지고 있다. 2022년에 들어서는 우크라이나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벨라루스에 러시아군이 진입하고 있단다. 이들 병력들은 2월 초에 있을 러시아-벨라루스 연합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분명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써 현재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는 서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으로 러시아군에 포위되어 있다. 미국의 판단대로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평화롭고 예술로 가득해 보였던 우크라이나에 왜 이런 위기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일까?

 

 

러시아와 벨라루스군 연합 훈련 (출처: RadioFreeEurope)

 

 

우크라이나 위기의 배경과 원인

 

 

 

우크라이나 위기는 러시아와의 갈등에서 파생되었다.

 

러시아와의 갈등은 우크라이나 위기를 고조시키다가 결국 2014년 전쟁으로 표출되었다. 러시아의 크림 반도 병합과 러시아가 지원한 돈바스 전쟁이 그것이었다. 전쟁으로 위기가 잠시 수그러드는 듯 했지만 갈등의 불씨는 오히려 깊은 심연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다시 표면으로 분출되면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또 다시 우크라이나에 전운이 밀려오고 있다.

 

 

1. 외부적 요인: 나토(NATO)의 확장

 

 

 

우크라이나 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나토(NATO)의 확장에 있다.

 

나토의 확장은 국제 질서의 변화, 그 중에서도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 변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 변화가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와 맞물리면서 우크라이나 위기를 불러왔다.

 

 

바이든과 푸틴 (출처: abcnews)

 

1991년 구()소련의 붕괴 이후 구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초기 서방과의 관계 복원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러시아는 붕괴된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서 서방 세계의 착실한 일원이 되려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서방세계와는 대립이 아니라 협력을 추구하면서 경제 재건에 주력하는 듯했다.

 

그러던 러시아가 점차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서방과 갈등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산유국으로서 원유 가격 상승이 가져온 경제 성장과 안정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겠지만 여기에는 보다 결정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확장이었다.

 

 

러시아는 왜 나토의 확장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토는 1949년 동서 냉전 시기 미국과 서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창설된 군사동맹이다.

 

회원국이 비회원국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상호 방위체계를 가동하는 집단 군사체계로 실질적인 대상은 구소련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창설되었다. 1955년에는 나토의 대응 기구로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군사동맹인 바르샤바 조약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 약칭 WTO 또는 WP)가 창설되었다.

 

1991년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구소련이 해체된 이상 나토의 주된 대상은 구소련을 계승한 러시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나토의 확장은 러시아에 대응하기 위한 집단 군사동맹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는 러시아에게 자국에 대한 군사적 봉쇄 또는 위협으로 인식될 수 있다. 러시아가 나토의 동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이유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출처: wikipedia)

 

 

나토(NATO)의 동진(東進)과 우크라이나 위기

 

 

 

나토의 동진이 왜 우크라이나 위기를 불러오는 것일까?

 

구소련이 해체되기 전 당시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나토의 동진은 없을 것이란 미국과 서방의 말을 믿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를린 장벽이 성난 군중에 의해 갑자기 무너지자 독일 통일의 논의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독일 통일의 키는 구소련이 쥐고 있었다. 당시 독일 통일을 둘러싼 미국과 구소련과의 논의에서 나토의 동진은 없을 것이라는 미국의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 러시아의 주장이다. 반면에 그런 언급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미국의 주장이다.

 

문제는 서면 작성이 없었다는 것. 당시 구소련은 구두 약속만을 받았지 서명으로 공식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무언가 약속은 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나토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구소련의 붕괴 전에 구소련이 직접 독일 통일과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해체를 결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구소련의 해체를 미국과 자유 진영의 승리로 인식하는 미국에게 나토의 동진을 제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나토의 동진을 통해서 러시아를 완전히 봉쇄하고 미국 중심의 일국 체제를 강화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토의 동진에는 거침이 없었다.

 

1999년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였던 체코, 헝가리, 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했다. 뒤이어 2004년에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발틱 3(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이 가입했다. 이중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러시아와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다. 2009년에는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가. 2017년에는 몬테네그로가 그리고 2020년에는 북마케도니아가 나토에 가입했다. 나토가 점점 러시아의 목을 조여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토의 확장 (출처: wikipedia)

 

이제 러시아와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만이 남았다. 이들 국가 중에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가 나토 가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들마저 나토에 들어가면 러시아는 완충지대 없이 직접 미군이 주도하는 나토군과 마주해야 한다. 이는 적어도 안보에 있어서는 러시아가 유럽으로부터 완전히 봉쇄되고 고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토 회원국 (출처: 연합뉴스)

 

 

러시아의 대외전략 급변, 수세적 방어에서 공세적 방어로

 

 

 

이런 상황에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색깔혁명(color revolution)’이 일어났다.

 

색깔혁명은 일종의 민주화 혁명으로 부패하고 독재적인 정부에 저항하는 비폭력 운동을 말한다. 2003년 조지아에서 장미 혁명(Rose Revolution), 2004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오렌지 혁명(Orange Revolution)이 일어나 기존 친러 정권을 몰아내고 친서방 정권이 들어섰다. 이들 친서방 국가들은 유럽 연합(EU)과 나토 가입을 더욱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출처: wikipedia)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나토 가입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러시아도 다급해졌다.

 

러시아에게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일종의 안보적 마지노선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대외 정책을 급속히 전환했다. 그간 유지했던 수세적 방어를 공세적 방어로 전환해 선제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들 국가들의 나토 가입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군사 작전이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가 2008년의 조지아 침공, 2014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다.

 

 

다음 글에 이어서.......

 

 

우크라이나 위기 1-2: 배경과 원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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