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꿈, 보헤미안의 삶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어 보다 자유로운 미래를 그린다

미얀마의 민주화와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며...

여행과 세계, 세계와 여행

두 번의 베이징 올림픽(Beijing Olympics)과 장이머우(張藝謀) 감독

경계넘기 2022. 2. 6. 14:46

 

 

두 번의 베이징 올림픽(Beijing Olympics)과 장이머우(張藝謀) 감독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어제 24일 개막식을 가졌다.

 

개막식을 보지는 않았다.

그저 뉴스 속에서 잠시 봤을 뿐이다.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이번에도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았단다.

그는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에서도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았었다.

 

중국 올림픽 개폐막식의 총감독. 

분명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야 하는 자리지만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정치적 재능이 더 높아야 하는 자리다.

 

 

2008 베이징 하계 올림픽 (출처: 연합뉴스)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출처: 동아일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하는 내내 나는 베이징에 있었다. 그 전해에는 베이징영화대학(Beijing Film Academy, 北京電影學院)에서 1년 동안 감독 수업도 받았었다. 베이징영화대학은 중국 유일의 영화대학. 장이머우 감독도 이 대학 출신이니 넓게 보면 내 선배가 된다.

 

한때는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를 참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영화인인지 장사꾼인지 정치꾼인지 분별이 가질 않는다. 분명 그의 예술적 재능은 뛰어나다. 하지만 돈과 권력의 냄새를 맡는 그의 재능은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압도한다.

 

그의 영화 세계는 정확히 돈과 권력을 쫓아 카멜레온처럼 변해왔다.

 

 

장이머우 감독 (출처: sbs뉴스)

 

그의 영화는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시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 중반까지.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영화에는 붉은수수밭(紅高梁)(1987)’, ‘국두(菊豆)(1990)’, ‘홍등(大紅燈籠高高掛)(1991)’, ‘귀주이야기(秋菊打官司)(1992)’, ‘인생(活着)(1994)’ 등이다.

 

이 시기 장이머우 영화들에는 강렬한 영상미 속에 중국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과 비판적 역사 인식이 담겨 있었다. 점차 현실 비판적 인식도 담겼고. 이 시기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유수의 해외 영화제에서 입상했지만 중국 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그의 영화들은 해외 영화제에 입상하고, 서구의 영화 시장에 어필하기 위한 전략적인 영화들이기도 했던 것 같다.

 

당시 국영 체제였던 중국 영화산업은 붕괴 직전의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영화는 정부 지원에 의해 겨우 제작되었고 그나마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정부 지원과 서슬 푸른 검열 아래에서 영화들은 중국 체제를 찬양, 고무하는 이데올로기 영화, 속칭 주선율영화(主旋律電影)일 수밖에 없었다.

 

장이머우 감독의 예술적 재능으로 봤을 때 이런 영화들은 죽어도 만들기 싫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작 자본을 어디서 구하고 상영은 어디서 할 수 있을까? 해답은 바로 해외 영화제와 해외 상영이 아니었을까. 이를 탓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장한 일이다. 다만 이 시기 그의 영화들이 철저히 영화제를 위한 영화 그리고 서구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오리엔탈리즘에 충실한, ‘쇼킹 아시아(Shocking Asia)’적인 영화였다는 비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처: 네이버영화)

 

두 번째 시기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2년 이전까지.

 

이 시기 장이머우 영화로는 책상 서랍 속의 동화(一個都不能少)(1998)’, ‘집으로 가는 길(我的父親母親)(1999)’, ‘행복한 날들(幸福時光)(2000)’ 등이 있다.

 

이 시기 그의 영화들은 중국 내의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를 담백하고 유쾌하게 담아내면서 이전 그의 영화들의 보였던 어려운 서사구조, 강렬한 영상미 그리고 쇼킹 아시아적 오리엔탈리즘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분명 중국 관객과 시장을 의식하며 상업성을 높인 영화들이었다. 이전의 사회 비판적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중국 내 상영을 목적으로 철저히 검열을 의식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체제 옹호나 이데올로기 수용 등의 국가 권력에 밀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 그의 영화 변신은 1993년 시행된 중국 영화산업의 시장화 개혁에 따라 점차 중국 영화산업에도 자본의 성장이 있었던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해외에서 받는 돈에 연연할 필요 없이 부족하나마 중국 내에서 자본의 조달과 흥행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출처: 네이버 영화)

 

세 번째 시기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이 시기 장이머우 영화들은 영웅(英雄)(2002)’, ‘연인(十面埋伏)(2004)’ ‘황후화(滿城盡帶黃金甲)(2006)’로 이어지는 3편의 무협(武俠) 대작영화로 대표할 수 있다.

 

이 시기부터 장이머우는 국가 권력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사회 비판적 모습을 완전히 지우고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의 3부작 무협 영화들에는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중화민족주의로 가득 채워졌다. 특히 영웅에서 그는 중국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개인의 작은 희생들은 불가피하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면서 체제 옹호와 국가주의를 가감 없이 표현했다.

 

상업성 역시 가일층 심화되었다. 이전의 영화적 스타일을 완전히 탈피해서 할리우드의 상업적 방식을 충실히 따랐다. 중국 영화에서 가장 흥행성이 높은 장르인 무협을 영화 소재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흥행을 전제로 막대한 자본을 투입되는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에 집중했다.

 

중국 영화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할 수 있는 2002년의 영웅26천만 위안의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현재 환율로 우리 돈 470억 정도의 금액이다. 반면에 당시 가장 큰 영화사였던 중국영화그룹이 그 해 제작한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겨우 2백만 위안, 우리 돈 36천만 원에 불과했다. 2002년 중국의 총 제작영화는 100. 단순 계산이긴 하지만 영웅을 제외한 나머지 99편의 총 영화 제작비를 중국영화그룹의 그해 평균 제작비인 2백만 위안으로 계산하면 영웅한 편 제작비가 나머지 영화 전체 제작비를 채우고도 남는다. 어쩌면 다른 영화들에게 돌아갈 몫을 그가 혼자 독식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한국 영화에서도 5백억에 가까운 제작비라면 손이 벌벌 떨리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당시 한국 영화산업 규모에도 현저히 떨어지는 중국 영화산업에서 그런 제작비가 어떻게 투자될 수 있었을까? 장이머우가 아무리 명감독이라 하더라도 그 역시 블록버스터 영화는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천문학적 제작비가 투자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보장이 있지 않았을까!

 

이는 두 번의 베이징 올림픽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요즘에도 장이머우는 짬짬이 영화를 찍어내고 있다지만 본 기억은 없다. 영화 제목도 모른다. 그의 영화를 볼라치면 자꾸 영악하고 노회한, 한 타락한 천재 예술인의 모습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가 돈과 권력에 짜웅을 하던 비비던 상관은 없지만 이제 정말 후배들과 중국 대중문화의 미래를 위해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가 지금처럼 계속 버티고 있어준다면 한국에는 그다지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장이머우 같은 사람들이 중국 대중문화를 깔고 앉아 뭉개고 있는 한, 중국 대중문화가 한국 대중문화를 넘어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by 경계넘기.

 

 

참고: 박정수. 「중국 영화 산업」 서울: 커뮤니케이션북,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