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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 여행/헝가리(Hungary)

D+190, 헝가리 부다페스트 3-1: 여행에는 항상 여유와 여백이 필요하다(20190523)

경계넘기 2020. 10. 25. 15:26

 

 

여행에는 항상 여유와 여백이 필요하다

 

 

어제 같이 다녔던 한국인 여성여행객 한 명이 오늘 떠난다.

 

고작 하루였지만 그새 친해져 아침부터 티격태격한다. 이 친구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6개월 정도의 일정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시작해서 남미 거쳐 유럽으로 넘어 온 친구다. 시간이 좀 있었으면 남미 정보를 좀 얻을 터인데 그러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다.

 

6개월 이상의 장기 세계여행자치고는 이 친구의 여행 스타일이 독특하다.

 

6개월 가까이의 모든 일정을 한국에서 미리 다 예약을 하고 다니고 있단다. 항공, 기차, 버스 등의 교통수단은 물론이고 호스텔 등의 숙소까지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모두 예약을 했단다. 여행도 시작 전에 6개월 가까운 기간을 한국에서 하루 단위로 계획을 다 세우고 그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인데 지금까지 별 문제가 없었단다. 유럽이나 북미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미 지역도 이렇게 다녔다니 계획이 철두철미한 것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놀랍다.

 

큰 틀에서 항공권 정도는 예약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렇게 세부 교통편까지 예약을 하는 경우는 장기 여행에서 드물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장기 여행에서는 항상 변수가 따르기 때문에 세부 일정까지 계획을 세워서 그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더욱이 한번 일정이 어긋나면 그 이후 일정도 줄줄이 날라 갈 수 있기 때문에 위험부담도 크다. 이 친구는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다고 하니 완벽주의 성격이거나 고지식한 성격이거나 아니면 둘 다 이거나 할 게다.

 

 

 

여행에 대한 경험이 많은 친구는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행을 많이 하다보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결코 계획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여행과 인생이 비슷하다고들 하는데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듯이 여행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 외부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내부적인 요인도 많다. 머물고 있는 곳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더 있고 싶어졌다거나 반대로 별로여서 빨리 뜨고 싶은 경우도 있고, 여행 중에 만난 여행 친구들이 너무 맘에 들어 그 친구들과 일정을 맞추어 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여행자들은 표를 찢는다는 표현을 쓴다.

 

예약했던 항공권이나 기차표 등을 찢어 버린다는 것인데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은 주로 예약 변경이나 환불이 안 되는 값싼 항공권을 사기 때문에 그냥 버린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표를 찢는다는 것은 내 의지에 따라 내 여행 계획을 스스로 바꾼다는 의미다.

 

사실 이게 여행의 진정한 묘미이기도 하다.

 

계획대로 안 되었다는 것은 여행 전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여행이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계획대로 되지 않은 여행이 더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가 언제부턴가는 대략적인 계획만 세우지 세부적인 계획을 거의 세우지 않고 있다.

 

여행이 계획대로 안 된다는 말에는 그렇기 때문에 여행에는 항상 여유와 여백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여유가 있어야 여행 중에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크게 당황하거나 다치지 않으면서 여행을 즐길 수 있고, 여백이 있어야 여행의 깊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친구가 여유와 여백이 없는 여행이 갖는 위험을 경험하게 된 작은 사건이 생겼다.

 

내 경우에는 조금 당황스럽긴 해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는 거의 멘붕이다. 남미를 포함해서 이미 4개월 이상 세계여행을 한 친구답지 않게 말이다.

 

친구는 오전 1120분 기차를 타고 오스트리아 빈(Wien)으로 갈 예정이었다. 출발역이 Keleti 기차역이었는데 마침 나의 다음 예정지인 세르비아 베오그라드(Beograd) 가는 기차도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기차표를 끊으러 가야해서 함께 갔다. 친구의 캐리어를 내가 끌고 숙소에서 40여분 넘게 걸어서 1050분에 Keleti 기차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할 수 없었던 문제가 생겼다. 기차역 보수공사 관계로 Keleti 역이 당분간 폐쇄되어 빈을 가는 열차가 당분간 Budapest-Déli 기차역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긴 한데 역무원 말이 다행히 Budapest-Déli 기차역이 이곳에서 지하철 타고 10분이면 가는 곳이란다.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으니 심리적으로는 좀 쫓기더라도 객관적인 시간은 넉넉했다. 그런데 이 친구 이미 넋이 나간 모양새다. 기차역 지하가 바로 지하철역인데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딱 멘붕이다. 혼자 보내면 당황해서 반대 방향 지하철이라도 탈 것 같아서 같이 가주었다. 시간이 충분하다 해도 서둘러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기차 출발 15분 전에 도착한다. 역에 내려서도 너무 당황해해서 친구보고 캐리어는 내가 끌고 갈 터이니 너는 앞장서서 역무원에게 표 보여주면서 플랫폼을 물어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기차에 탑승하고 나서야 정신을 좀 차린다.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빈까지는 기차나 버스로 2~3시간 정도의 거리로 가깝기도 하지만 차편도 많다. 기차를 놓치면 다른 기차를 타면 되고, 기차가 없다면 버스를 타고 가도 된다. 오전이라 시간도 충분하고 가까운 거리라 표가 비싼 것도 아니다. 정 안 되면 하루 부다페스트에서 더 묵으면 내일은 반드시 표가 있는 구간이다. 좀 귀찮아서 그렇지 심각하게 당황할 구간은 아니다. 그럼에도 친구는 마치 국제선 비행기라도 놓치는 모양새다. 내가 보기에는 기차를 놓쳤을 때 벌어질 일에 대한 걱정보다는 모든 일을 계획대로 움직여야 하는 친구가 그게 안 되었을 때 나타나는 극도의 불안감으로 보인다.

 

 

 

물론 이 친구만의 경우는 아니다.

 

나 역시도 예전에는 그랬으니까. 내가 그 친구의 모습을 보고 저러다 다른 방향의 지하철을 탈 수도 있을 것 같아 같이 가주기로 한 것은 내가 실제로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하고 당황하다보면 정말이지 간단한 것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엉뚱한 차를 타기도 하고, 짐을 놓고 가기도 하고. 친구도 여행을 자주할수록 이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여행도 인생처럼 계획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친구를 보내고 역창구로 가서 베오그라드 가는 기차를 물어보니 베오그라드 행 기차는 또 다른 역에서 출발한단다. 뭔 놈의 기차역이 이리도 많은지. 아울러 역무원은 그 역이 시내에서 상당히 먼 외곽에 있다고 말해주면서 친절하게 그 역에 가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그냥 버스로 가기로 한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