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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 여행/중국(China)

D+038, 중국 쿤밍 1-2: 윈난성(雲南省)의 성도 쿤밍(昆明)(20181222)

경계넘기 2021. 1. 19. 11:39

 

 

윈난성(雲南省)의 성도 쿤밍(昆明)

 

 

기차표를 사고 쿤밍(昆明)역을 나서는데 이제 겨우 오후 3시다.

 

저녁 11시 기차니 시간이 많이 남는다. 기차역에 짐을 맡기고 쿤밍 시내나 돌아보기로 한다. 일단 기차역 안의 짐 맡기는 곳에 배낭을 맡기고 역 앞에서 인터넷을 검색한다. 쿤밍에서 가볼 만한 곳을 찾는 중이다. 아무리 뒤져도 쿤밍 시내에 마땅한 곳이 없다. 하긴 쿤밍 역시 두 번째 방문이지만 근교의 석림(石林)을 빼고는 시내에서 기억나는 곳이 없다.

 

잠깐, 윈난 대학(雲南大学)이 자주 검색 된다.

 

다른 도시에는 볼 수 없는 일인데 윈난 대학에 볼거리가 있나 보다. 그곳이 중심가를 지나는 길이기도 해서 그곳으로 가보기로 한다. 역에서 버스 한 번 타면 바로 간다.

 

쿤밍에 와서 첫 가는 곳이 대학이라는 것이 생뚱맞기는 하지만 쿤밍이 중국 교육의 보루이자 산실일 때가 있었다. 지금은 윈난성의 당당한 성도지만 쿤밍은 20세기 초까지 작은 시골 도시였다. ()로 정식 승격된 것도 1935년의 일이다. 쿤밍이 중국 역사에 등장하면서 급속히 성장하게 된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중일 전쟁 때다.

 

1937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은 곳곳에서 일본군에 밀리기 시작했다. 일본의 파상공세에 놀란 중국인들과 기관들이 전쟁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곳 윈난성 쿤밍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폭격을 피해 기업들과 공장들도 이곳으로 이전해서 세워졌다. 전쟁 중에도 학생들의 공부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장 장제스(蔣介石)의 신념에 따라 전쟁 지역의 중국 대학들이 이전을 서둘렀다.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 베이징대(北京大), 칭화대(淸華大) 그리고 난카이대(南開大)는 연합하여 국립서남연합대학(國立西南聯合大學)을 설립하고 머나먼 이곳 쿤밍으로 이전했다.

 

중국 최고의 3개 대학이 연합했으니 국립서남연합대학이 전시 중국의 최고 대학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립서남연합대학이 쿤밍에 둥지를 튼 8년 동안 8,000여 명의 재학생과 2,52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전쟁 이후 중국을 이끌 인재들을 키워냈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대학도 각기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당시의 터에 남은 학교가 하나 있다고 한다. 윈난사범대학(雲南師範大學)이 그곳이다.

 

기차역에서 2번 버스를 타면 바로 위난대학이 나온다.

 

시내를 관통하는 지라 교통이 좀 막힌다. 내 짧은 기억에도 쿤밍에서는 차가 많이 막혔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도 그렇다. 유난히 쿤밍 시내는 차가 많이 막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니다. 40분 정도 달려서 위난 대학에 도착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만두 가게가 보여 만두 한 판을 먹는다. 점심이지만 오늘 첫 끼다. 대학가라 그런지 가격이 싸다. 한 판에 7위안. 맛도 괜찮다. 주인아저씨가 무척이나 무뚝뚝하지만.

 

윈난 대학에서 도로 하나를 두고 맞은편에 윈난사범대학이 있다. 여기가 쿤밍의 대학촌이다.

 

 

 

윈난사범대학을 뒤로 하고 윈난 대학으로 들어간다.

 

왜들 윈난 대학을 가나 했더니 대학 교정이 거의 역사 유적지에 버금간다. 윈난 대학은 20세기 초 이곳 쿤밍의 군벌이 세웠다고 하는데 당시의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유적지화 되어있다. 특히 이들 건물들은 항일전쟁 시기 국민당 정부에 의해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장제스가 사용했다는 건물도 있다. 역사가 묻어 있다. 

 

 

 

교정도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 나무도, 잔디도 잘 정리되어 대학이라기보다는 공원 같다. 교정을 걸으면서 사진을 찍는 쿤밍 시민들도 많이 보인다.

 

 

 

캠퍼스를 걷다가 노래 자락이 흘러나오는 한 건물에 멈춰 섰다.

 

열러진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성악과이거나 합창단 수업으로 보인다. 노래 부르는 친구들의 폼이 아마추어는 절대 아니다. 흘러나오는 노래 가락을 듣고 있자니 절로 흥이 난다.

 

윈난 대학 교정에는 사진 찍는 친구들이 유독 많이 보인다. 교정이 예뻐서 사진 찍는 일반 사람들도 있지만 그 중에는 사진을 전공으로 하는 친구들도 제법 많이 보인다. 모델을 사용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래도 사진학과의 과제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과 사진 등을 보니 윈난 대학이 예체능으로 유명한 대학이 아닌가 싶다.

 

 

 

대학을 나와서 같은 버스를 타고 내려오다 시내 중심가인 듯한 곳에 내린다.

 

올 때 버스에서 봐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쿤밍 라오지에(老街)가 있다. 베이징의 난뤄구샹(南锣鼓巷), 청두의 콴자이샹즈(宽窄巷子)나 서울의 인사동 같은 곳이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이래저래 운치가 있는 곳이다.

예스런 건물들이나 낡은 건물들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준다.

 

 

 

조금 높은 상가 옥상에서 보니 제법 큰 규모의 사합원(四合院)들도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곳도 개발의 파고를 피해가지 못한다. 화려한 쇼핑거리로 탈바꿈 중이다.

 

 

 

길을 걷다 니에얼(聶耳)의 생가를 만난다.

 

니에얼은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義勇軍進行曲)’을 작곡한 사람이다. 우리의 안익태와 같은 분이다. 니에얼이 이곳 쿤밍의 한약방 막내아들이었단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유일한 책이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1’이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 니에얼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읽은 내용이었는데 생가 앞에 있는 안내문을 읽고야 무릎을 친다. 책의 실제 배경을 이렇게 우연히 만난다.

 

 

 

거리를 구경하고 나오니 시간이 애매하다.

 

버스를 타고 가자니 너무 빠르고. 그래서 천천히 역에서 버스가 왔던 거리를 걸어서 가기로 한다. 쿤밍 시내를 구경하면서. 슬슬 배가 고파지는데 문제가 있다. 지금 나에겐 100위안짜리 지폐 4장과 50위안 정도가 있다. 오늘 쓰고도 남는 풍족한 돈이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100위안 지폐를 헐게 되면 환전이 어렵다는 것. 되도록 잔돈인 50위안을 오늘과 내일 중국에서 쓰고 4장의 백 위안 화폐를 살려서 국경에서 환전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있어도 돈을 쓰지 못하고 있다. 제과점이 보여서 빵을 산다. 저녁 겸 기차 안에서 먹을 겸해서다. 길을 걸으며 빵을 먹는다. 이내 배고픔은 사라진다. 남은 빵은 기차와 내일 아침 먹을 요량이다.

 

 

 

동행의 친구가 있다면 돈을 깨서 괜찮은 식당에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즐길 수도 있으련만. 혼자인 지금은 그마저도 귀찮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니 못내 아쉽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