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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 여행/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D+201, 보스니아 사라예보 1-2: 8백 달러가 사라졌다! (20190603)

경계넘기 2022. 4. 9. 13:45

 

 

8백 달러가 사라졌다!

 

 

터미널에서 잠시 비가 멈추기를 기다린다.

 

장대같이 퍼붓는데 아무리 봐도 쉽게 멈출 것 같지가 않다. 터미널에서 숙소까지는 대충 30분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 이 빗속에서는 우산을 쓰고 간다 하더라도 비 맞은 생쥐 꼴을 면하기 어렵다. 일단 카페나 레스토랑 등 어디라도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스니아 돈이 필요하다.

 

마침 터미널 옆 건물에 은행이 보인다.

 

은행인줄 알았는데 은행은 아니고 환전소다. 비상금으로 달러를 가지고 있으니 달러를 환전하기로 한다. 복대 안에 감춘 달러를 꺼내는데 달러가 없다. 두 군데 분산한 곳 모두 백 달러 한 장만 있고 모두 사라졌다.

 

백 달러짜리 지폐가 9장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백 달러짜리 10장을 가져와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Bucureşti)에서만 백 달러 한 장을 환전했다. 그런데 달랑 한 장뿐이라니. 도둑맞은 것이 분명하다. 이동 중 소매치기를 당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복대가 모두 사라져야 하는데 복대는 그대로 있고, 복대 안에 숨겨 놓은 달러만 사라졌다.

 

순간 섬뜩한 생각이 스치고 간다.

 

여권은 항상 확인하는 것이니 바로 카드를 확인한다. 다행히 카드는 그대로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지만 섬뜩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비상금 달러를 복대에 있는 카드 케이스와 여권 케이스에 분산해 보관한다. 돈을 가져가려면 당연히 카드와 여권에도 손을 댈 수밖에 없다. 도둑이 카드와 여권까지 가져갔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현금만 가져가고 카드와 여권은 그대로 둔 도둑님의 아량(?)에 감사를 드려야 할 판이다.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절대 아마추어 도둑은 아니다.

 

달러 비상금을 최종 확인한 것이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Bucuresti)였다. 그 이후로 몬테네그로 코토르(Kotor)의 한국인 호스텔을 제외하면 숙소에 모두 사물함이 있었다. 그것도 배낭까지 넣을 수 있는 사물함. 이 경우 복대를 배낭에 넣고 배낭의 자물쇠를 채운 채로 사물함에 넣었다. 항상 자물쇠를 채웠으니 복대를 꺼내려면 사물함과 배낭의 자물쇠 2개를 따야 한다.

 

여태 사물함이나 배낭의 자물쇠가 절단된 적이 없으니 자물쇠를 따고 훔쳐 갔다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카드나 여권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달러 한 장을 그대로 두어서 눈속임까지 하는 여유를 부렸다는 점 등으로 봐서 프로의 솜씨다.

 

혼자 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100달러 지폐를 접어서 여권 케이스와 카드 케이스 안에 각각 숨겨 둔다. 아울러 복대도 배낭의 티 나지 않는 두터운 겨울옷 안에 숨겨 둔다. 배낭 전체를 일일이 꺼내서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미리 알고 있지 않는 한 철두철미하게 숨겨둔 물건을 하나하나 찾아서 꼼꼼히 가져가고 뒷정리도 하려면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사람이 수시로 다니는 도미토리 방에서 망보는 사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몬테네그로

 

자꾸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의 숙소가 맘에 걸린다.

 

그곳의 스텝들. 그때에도 몇몇이 몰려다니는 것이 영 마땅치 않았다. 부다페스트의 숙소는 대형 호스텔이었다. 직원도 많고. 더욱이 객실 청소는 객실에 손님이 없거나 있더라도 내보낸 뒤에 했다. 당연히 2~3명이 같이 했다. 직원이라면 여권이나 카드를 손대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여권과 카드는 항상 확인하는 것이니 바로 도난 사고를 인지해서 숙소에 알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부다페스트의 숙소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저 합리적 의심뿐이다. 부다페스트 이후로는 직원 1~2명이 운영하는 소규모 게스트하우스에 있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갑자기 여행의 전의(戰意)가 사라진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털리니 황당해서다. 우는 놈 뺨 때린다고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진다. 그나마 여권과 카드는 그대로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스스로 위로를 하지만 컴컴한 하늘 마냥 내 마음도 캄캄하다. 더욱이 통장에 잔고가 거의 떨어져 가는 상황이라 8백 달러는 더욱 아쉽다.

 

오늘로 딱 여행 201일째.

제대로 200일 빵을 치른 셈이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다치지 않고 여권과 카드도 분실하지 않고 그저 돈으로 액땜했다고 좋게 생각한다. 일단 숙소까지는 8백 달러 생각을 잊기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2차 사고를 당하기 딱 좋다.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생기는 머피의 법칙은 앞의 첫 사건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안 좋은 기분을 계속 가지고 있거나 안 좋았던 일에만 계속 신경을 쓰다보면 다른 일에 부주의하게 되면서 다른 사고가 발생하는 법이다.

 

지금 난 막 낯선 땅에 도착한 여행자다. 계속 도둑맞은 800불에 정신을 팔다보면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소매치기를 당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울적한 기분까지야 어떻게 할 수 없다지만 도둑맞은 8백 달러는 접어둔다. 고민은 숙소에 가서.

 

일단 짐부터 다시 챙긴다.

 

8백 달러를 찾느라 사람 많은 환전소에서 복대다 배낭이다 죄다 풀어 놨다. 다시 짐들을 챙기고 손에 물건을 들지 않도록 두 개의 배낭에 다 담는다. 핸드폰마저 배낭에 담고 손에는 우산만 든다. 정신을 차린다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주의가 산만해질 수밖에 없는 법. 물건을 놓고 다니거나 소매치기 당하기 딱 좋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한다.

 

환전은 안 되니 일단 은행을 찾아 보스니아 돈을 좀 찾아 숙소에 가야한다. 여기에 집중한다. 덕분에 이날 사라예보의 사진이 한 장도 없다. 혹시 몰라서 카메라고 핸드폰이고 되도록 배낭에서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몬테네그로

 

기분도 울적한데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비는 전혀 그칠 것 같지 않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우산을 쓰고 조금씩 걸어가 본다. 은행 ATM을 찾으면 돈을 찾아서 카페나 식당에라도 들어가기로 한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걷는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마음이 비까지 내리니 더욱 심란하다.

 

그래도 머피의 법칙은 생기게 마련인가 보다.

 

은행이 보여서 돈을 좀 찾는다. 조금 걸으니 카페도 눈에 보인다. 따뜻한 커피 한 잔 하면서 마음도 가다듬고 비도 피하자는 생각에 들어간다. 입구에 우산꽂이가 있어 우산을 그곳에 꽂고 커피 한 잔을 한다. 카페에서도 되도록 8백 달러 생각은 접고 비오는 사라예보 거리의 풍경에 집중한다.

 

그런데 나가려고 보니 우산꽂이에 내 우산이 없다.

 

엎친 데 겹치고, 우는 아이 뺨 때린다고 우산을 훔쳐가다니. 사라예보 첫 날부터 어이가 없다. 하지만 사실은 앞서 들어오면서 우산꽂이 앞에서 살짝 고민을 했었다. 아무래도 비가 많이 내리고 있는 중이라 입구의 우산꽂이에 우산을 두면 훔쳐가거나 바꿔갈 가능성이 높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으로 카페 바닥을 버리는 것이 좀 그랬다. 우산을 담을 비닐도 없었다. 그냥 두고 들어왔다.

 

한 마디로 예측된 사고라는 것. 살짝 짜증은 나지만 열 받거나 당황할 정도는 아니다. 예기치 않다가 당했다면 도둑맞은 8백 달러 생각과 합쳐져서 정말 돌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연히 더 큰 2차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이래서 사고를 당하면 얼른 털어버려야 한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우산이 없다고 계속 카페에 있을 수만은 없다.

 

방수 점퍼를 꺼내 입고 터벅터벅 걷는다. 다행히 비가 좀 잦아진다. 이럴 줄 알고 사라예보에서는 개인실을 얻어나 보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던져 놓고 근처 마트에 가서 맥주와 먹을거리를 산다. 맥주라도 마셔야 잠이 올 것 같아서다. 비는 쉬지 않고 내린다.

 

사라예보 첫 날의 일이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