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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 여행/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D+203, 보스니아 사라예보 3-2: 사라예보의 참혹한 기억 2, 보스니아 전쟁

경계넘기 2022. 4. 12. 19:42

총탄 자국의 옛 건물과 두 동의 현대식 빌딩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사라예보(Sarajevo)의 참혹한 기억 2, 보스니아 전쟁(Bosnia War)

 

 

숙소 사장님을 보내고 홀로 사라예보(Sarajevo)를 거닐어 본다.

 

그간 이틀을 방구석에서만 보냈다. 연일 비가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욕도 나지 않았다. 내일 사라예보를 떠날 예정이니 오늘 아니면 사라예보를 볼 시간이 없다. 의욕은 없지만 힘을 내본다. 사라예보는 현대사의 한 장을 장식했던 곳이라 오고 싶었던 곳이 아닌가.

 

걷다 보니 곳곳의 건물들에 총탄이나 포탄 자국 같은 것들이 보인다.

 

처음에는 그냥 건물의 외부 디자인인가 싶었다. 하지만 뒷골목의 낡은 아파트 건물들에까지 나 있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이 전쟁의 처참한 상흔임을 알았다. 사라예보의 시가지를 조금만 걸어도 오래되었다 싶은 건물에는 여지없이 수많은 총탄과 포탄 자국이 남아 있다.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 전쟁의 상흔들은 전쟁 경험이 없는 나에겐 상당한 충격을 던진다. 순간순간 당시 시민들이 가졌을 극도의 공포가 엄습해오기도 한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일어났던 보스니아 전쟁의 상흔들이다.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 중의 하나,
보스니아 전쟁(Bosnia War, 1992-1995)

 

 

 

20세기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전쟁 중의 하나.

 

보스니아 전쟁(Bosnia War)을 지칭하는 말이다. 19924월부터 199512월까지 있었던 보스니아 전쟁으로 수십 만 명이 죽었고, 전쟁 기간 중 세르비아계인들에 의한 조직적인 집단 학살, 인종 청소, 집단 강간 등 반인륜적인 행위들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올드타운을 안내해준 숙소 사장이 조심스럽게 꺼냈던 사라예보의 자랑.

 

같은 공간에 성당과 교회, 모스크가 있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사라예보. 하지만 그것은 조화롭게 공존할 때의 이야기다. 잔혹한 보스니아 내전의 근본 원인은 바로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불완전한 공존에 있었다. 조화되지 못한 공존. 그것은 곧 갈등이고 대립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이하 보스니아)는 구()유고슬라비아 연방(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에서 독립한 국가다.

 

구유고 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슬로베니아(Slovenia), 크로아티아(Croatia),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세르비아(Serbia), 몬테네그로(Montenegro),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의 남()슬라브 6개 공화국을 결성해 세운 사회주의 연방 국가였다. 유고슬라비아란 말 자체가 남슬라브인들의 땅이란 의미를 갖는다.

 

남슬라브인의 국가였지만 구유고 연방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무슬림 보스니아인, 몬테네그로인, 마케도니아인의 6개 세부 민족들로 갈라져 있었고, 여기에 슬라브족이 아닌 알바니아인까지 7개 민족들이 공존했다. 종교 역시 서로 배타적인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이 각기 세력을 가지고 오랫동안 서로 경쟁하면서 공존했다.

 

 

구유고슬라비아 연방 (출처: wikipedia)

 

연방을 구성한 6개 공화국들 중에서도 보스니아는 유독 복잡했다.

 

여타 공화국들은 대체로 각각의 지배 민족과 지배 종교가 있었다. 그러나 보스니아는 1992년 전쟁 발발 당시만 해도 민족 구성에서 무슬림 보스니아인이 44%, 정교도 세르비아계가 33.5% 그리고 가톨릭 크로아티아계가 17%을 차지하고 있었다. 엇비슷한 민족들이 일종의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보스니아의 민족 구성 (출처: wikipedia)

 

1991년에 들어 구유고 연방도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1980년대 말부터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흔들리고, 1991년 구소련마저 붕괴되자 구유고 연방도 해체 수순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평화롭게 해체되었던 구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구유고 연방은 폭력적으로 해체되었다. 구유고 연방의 주축 국가였던 세르비아가 구유고 연방의 해체를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독립을 원하는 각 공화국들은 독립을 위해 세르비아와 전쟁을 치워야만 했다. 슬로베니아 전쟁(1991.6-7)부터 크로아티아 전쟁(1991-1995), 보스니아 전쟁(1992-1995) 그리고 마지막 코소보 전쟁(1998-1999)까지 4번의 전쟁이 치러졌다. 이를 통칭해서 유고슬라비아 전쟁(Yugoslavia War)이라고 부른다.

 

이들 중 가장 치열하고 잔혹했던 전쟁이 보스니아 전쟁이었다.

 

보스니아 전쟁이 유독 치열하고 잔혹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민족 간 극심한 대립에 있었다. 199233일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이 이에 반발해 자체적으로 세르비아계 국가인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을 만들고, 세르비야계 민병대를 조직하여 사라예보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구유고 연방군이 직접 전쟁에 개입하기보다는 주로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세르비아 민병대가 보스니아 정부군과 싸웠다. 물론 세르비아가 주축을 이루는 구유고 연방군이 이들을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보스니아 전쟁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서도 내전의 성격이 강했다.

 

집단 학살, 인종 청소 등의 전쟁 범죄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주도 아래 비무장 무슬림 보스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인종 청소가 일어났다. 보스니아 영토 내에 세르비아계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최대한 보스니아인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다. 잔혹한 집단 학살, 집단 강간과 성폭력 그리고 강제 추방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때때로 크로아티아계에 의한 보스니아인 집단 학살도 발생했다. 전쟁이 종반에 다다른 1995년에는 수세에 몰린 세르비아계가 더욱 악랄하게 집단 학살과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사라예보 포위전(1992.4.5-1996.2.29)

 

 

비극적인 보스니아 전쟁의 한 축에는 이곳 사라예보가 있었다.

 

보스니아 전쟁이 발발한 199245일부터 1996229일까지 1,425일 동안 사라예보는 세르비아계 병력들에 의해 포위당했다. 초기에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이후에는 세르비아계 공화국군이 사라예보를 포위했다. 사라예보 포위전은 현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포위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라예보는 좁은 계곡에 만들어진 도시다.

 

사라예보는 트레베비치산(Mt. Trebević) 산기슭의 좁은 계곡에 밀라츠카강(Miljacka River)을 따라 동서로 길게 형성된 도시다. 도시 가운데의 강 주변은 그나마 평지지만 위아래로는 산비탈의 경사지를 형성하고 있다.

 

 

사라예보 전경 (출처: wikipedia)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세르비아계 공화국군은 전쟁 개시와 함께 사라예보를 포위했다.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막고 군수물품은 물론이고 식량과 의약품의 진입조차 막았다. 아울러 전기, , 난방 등도 막아서 시민들을 아사 직전으로 몰았다.

 

여기에 강 양편 산비탈의 고지대에 주둔한 세르비아계 병력들은 사라예보 시가지를 무차별로 공격했다. 민간인 지역에 대한 포격은 물론이고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곳곳에 저격수를 배치해서 거리의 민간인을 저격하였다. 저격이 많이 발생하는 거리와 도로에는 저격수 조심이라는 표지가 붙었고, 특히 저격이 심했던 도로는 저녁수의 골목이라는 이름도 붙었다고 한다. 이들은 사라예보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사라예보 건물들에 나 있는 무수한 포탄과 총탄 자국이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시민들의 공포가 어떠했을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실제로 사라예보 포위전 기간 동안 사망자만 민간인 5,434명을 포함 13,952명에 이르렀다. 도시의 건물 중 23%는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64%는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다. 특히 기간 건물인 병원, 의료 단지, 미디어 및 통신 센터, 산업 단지, 관공서 등은 물론이고 문화재까지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었다고 한다.

 

 

포위전 당시의 사라예보 (출처: wikipedia)
포위전 당시의 사라예보 (출처: wikipedia)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전쟁이 가장 공포스러운 점은 보스니아인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학살하고 강간하고 저격했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이 바로 그들과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이웃이자 친구이자 동료였다는 사실이다. 수십 년을 같이 했던 이웃이, 친구가,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들을 고문하고 학살하고 자신의 부인과 딸들을 강간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만큼 잔혹한 것이 또 있을까!

 

숙소 사장이 말했듯 보스니아, 특히 사라예보에는 가톨릭 성당, 정교회 성당, 그리고 이슬람 모스크가 같이 있다. 이것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가지고 있는 민족적 다양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평화롭지 못한 공존은 오히려 처참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스니아 전쟁은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러기에 사라예보의 문화적 다양성이 오히려 내 눈에는 위태롭게 보인다.

 

불안정한 공존.

언제고 다시 불거질 수 있는 잠재적 위험.

 

그게 내가 보는 사라예보의 현재 모습이다.

 

참고로 보스니아 전쟁과 사라예보 포위전을 다른 영화를 소개해 본다.

 

대표적으로 투와이스 본(Twice Born, 2012)’노 맨스 랜드(No Man's Land, 2004)’이 있다. 두 영화 모두 명작으로 영화 자체로도 훌륭하다. ‘노 맨스 랜드가 보스니아 전쟁을 희극적으로 그렸다면 투와이스 본은 한 연인의 엇갈린 삶을 통해 보스니아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투와이스 본에서는 사라예보 포위전의 모습도 실감나게 다룬다. 보스니아 전쟁의 이해와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고 싶다면 역시 투와이스 본이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