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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03, 보스니아 사라예보 3-1: 사라예보의 참혹한 기억 1, 제1차 세계대전 (20190605)

경계넘기 2022. 4. 12. 11:36

 

 

사라예보(Sarajevo)의 참혹한 기억 1, 1차 세계대전

 

 

오전에 숙소를 옮긴다.

 

묵고 있는 숙소가 연장이 되질 않아서다. 5분 거리에 있는 숙소로 이곳도 1인실이다. 이전 숙소와 비교해서 방 크기는 비슷하지만 이곳이 훨씬 더 깔끔하다.

 

 

숙소 골목

 

사장이 사라예보를 안내해 준단다.

 

짐만 방에 두고 다시 나오는 나를 보고 호스트가 묻는다. 사라예보(Sarajevo) 어디를 갈 생각이냐고. 그냥 한번 둘러볼 생각이라고 말하자, 자신이 가봐야 할 곳을 알려주겠다며 같이 길을 나선다. 자신이 속성으로 안내해줄 터이니 이후에 천천히 둘러보란다. 올드타운으로 함께 온 사장이 볼거리들과 가볼 만한 식당까지 세세하게 알려준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데 사장이 친절할 뿐만 아니라 무언가 사명감이 있어 보인다.

올드타운을 걸으며 사장이 나에게 묻는다.

 

사라예보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들어요?”

내가 머뭇거리자 먼저 그가 말한다.

아마 전쟁이겠죠. 안 그래요? 1차 세계대전도 그렇고 보스니아 전쟁도 그렇고,”

그가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보스니아는 아름다운 곳도 많고, 유서 깊은 곳도 많아요. 사라예보만 해도 잘 보면 가톨릭 성당, 정교회 성당, 유대교 성당 그리고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만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도시죠. 그럼에도 전쟁으로만 기억되어서 안타까워요.”

 

 

 

안타깝게도 전쟁은 사라예보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기억이다.

 

나 역시 이곳을 온 이유가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라예보는 두 가지 전쟁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상지로, 다른 하나는 보스니아 전쟁의 현장으로. 여기에 특별히 한국인에게는 1973년 세계탁구선수권 여자 단체전에서 건국 이후 처음으로 한국이 구기 종목을 우승한 곳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사장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다양한 문화와 역사 공간으로서의 사라예보는 적어도 지금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나에게도 사라예보는 전쟁의 상흔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다.

 

 

1차 세계대전의 발상지, 사라예보(Sarajevo):
두 개의 총알이  불러온 어마어마한 비극

 

 

 

안타깝게도 사장이 먼저 안내해준 곳도 제1차 세계대전의 발상지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된 장소. 그곳은 사장의 안내가 없었다면 찾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라곤 골목 한 귀퉁이 벽면에 붙은 몇 장의 사진들과 보도블록 위에 세워진 작은 이정표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허탈감마저 든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좁은 골목 한 모퉁이에서 그 큰 현대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니 말이다. 역사의 현장을 한 화면에 담으려고 해도 길이 좁은 탓에 광각이 아닌 내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다.

 

 

암살 장소. 사진 우측의 강변길을 달리던 황태자의 차량이 우회전해서 들어오려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고 사진이 있는 윈도우 앞에 후진하기 위해 잠시 정차하는 순간 여기에 서 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 (Gavrilo Princip)가 저격
암살 장소
우측이 라틴교(Latin Bridge), 맞은편 사잇길이 암살 장소. 황태자는 이 길을 달려 라틴교 앞의 사잇길로 잘못 우회전하다 암살 당한다.

 

1914628.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황태자 부부가 이곳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로서 군대의 사열을 보기 위해서 왔다고 알려졌다.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이후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당일 오전 황태자 부부를 태운 차량 행렬이 사라예보 한가운데를 흐르는 밀라츠카(Miljacka)강 옆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연도에는 환영 인파로 가득했다. 그때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폭발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에서 한 블록 아래에서 났다. 황태자 부부의 예상 동선을 따라 민족주의 단체인 청년 보스니아(Young Bosnia)의 암살자 6명이 곳곳에 잠복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암살자가 황태자 부부가 탄 차량에 폭탄을 던졌다. 다행히 그가 던진 폭탄은 황태자 부부가 탄 차량을 피해 바로 뒤에 따라오던 차량에 맞았다. 황태자 부부는 무사했지만 다수의 사상자가 생겼다.

 

하지만 황태자 부부의 운도 거기까지였다.

 

사라예보 시청(Town Hall)에서 공식 행사를 마친 황태자가 폭탄 테러로 부상당한 사람들이 있는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자고 했다. 갑작스런 일정이라 수행원들은 우왕좌왕했다. 새로운 길을 황태자 운전수에게도 제대로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소통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황태자를 태운 차가 길을 잘못 들었다. 강변 큰길을 달리던 차가 잘못 우회전해서 막 사잇길로 들어서려던 순간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안 운전수가 후진하기 위해 차량을 멈춘 곳이 하필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가 황태자를 암살하기 위해 서 있던 곳이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사잇길 어귀. 운전수가 암살자 바로 앞에 황태자 부부를 공손히 데려다 준 셈이다.

 

차는 서 있고 무방비 상태. 다가선 프린치프가 한 발은 황태자에게, 다른 한 발은 황태자비에게 쐈다. 단 두 발의 총알로 충분했다. 그렇게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태자의 이동 경로와 암살 장소 (출처: wikipedia)
폭탄 테러와 암살 위치 세부 지도 (출처: wikipedia)

 

왜 그는 황태자를 암살했던 것일까?

 

시간을 뒤로 확 돌려야 할 것 같다. 7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 발칸반도에는 슬라브족들이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발칸에 정착한 슬라브족들을 특별히 남슬라브족이라 칭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오랫동안 주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다. 보스니아를 경계로 북쪽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각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를 받다가 이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형성되면서 그 아래로 들어갔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1877~78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세르비아는 독립했지만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다시 강제로 병합되었다.

 

그 무렵 발칸에도 민족주의의 물결이 밀려왔다.

 

18세기 후반 서유럽을 강타했던 민족주의의 파고가 19세기 중엽에는 발칸에도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종교와 지형에 따라 갈라졌던 발칸의 남슬라브족들 사이에서 가톨릭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정교회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고 이슬람의 보스니아 등이 각각의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 여기에 독립한 세르비아 왕국을 중심으로 발칸의 남슬라브 민족들을 통합해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남슬라브 민족주의도 대두되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병합은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운 러시아와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죽 써서 개 준 꼴이었다. 남슬라브 민족주의를 세워 남슬라브 통합 국가를 세우려는 세르비아나 범슬라브주의를 기치로 발칸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로서는 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보스니아를 독립시켜 세르비아 왕국과 통합시키려는 남슬라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러시아는 이를 배후에서 지원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난 것이 사라예보 사건이었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프린치프는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시켜 남슬라브 통일 국가를 세우려는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였다. 당시 그는 청년 보스니아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암살 계획을 세웠고 1914628일 이를 실행에 옮겼다.

 

 

가브릴로 프린치프 (Gavrilo Princip)(출처: wikipedia)

 

사라예보에서 울린 두 발의 총성은 거대한 나비 효과를 불어 일으켰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즉각 세르비아를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고 10가지 항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가 이들 중 8가지만 수락하자 오스트리아는 728일 선전 포고와 함께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보스니아 독립을 부추기는 세르비아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오스트리아로서는 세르비아를 쓸어버릴 구실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라예보에 울렸던 두 발의 총성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가져왔고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서막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영화 킹 페타르: 세계대전의 서막(King Petar)’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세르비아 영화라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그렸겠지만 잘 만든 영화이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보시길 바란다.

 

 

킹 페타르: 세계대전의 서막(King Petar Ⅰ)

 

킹 페타르: 세계대전의 서막(King Petar Ⅰ)

□ 제 목 : 킹 페타르: 세계대전의 서막(King Petar Ⅰ) □ 감 독 : 페타르 리스톱스키(Petar Ristovski) □ 국 가 : 세르비아, 그리스 □ 제 작 : 2018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Beograd)를 걷다보면 폭격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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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효과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이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공격하자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했다. 러시아의 참전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동맹 관계에 있던 독일이 전쟁에 자동 참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이 참전하자 러시아와 삼국 협상을 맺은 영국과 프랑스도 전쟁에 개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191811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여 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연합국과 동맹국 양측의 사상자는 도합 3,700만 명에 이르고, 민간인은 순수 사망자만 1,300만 명에 이르렀다. 숫자만으로는 감히 실감조차 할 수 없는 참혹한 결과였다.

 

이 어마어마한 현대사의 사건이 바로 지금 좁은 골목길 위의 내 발 밑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전율이 오른다.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 좁은 길 위에서 벌어진 사건 하나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황태자를 암살한 그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도 감히 이런 결과를 상상이나 했었을까!

 

진정한 나비효과!

단 두 발의 총탄이 가져온 결과였다.

 

사라예보는 그런 곳이었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