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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 여행/칠레(Chile)

D+353, 칠레 산티아고 1: 잔뜩 긴장한 여행객, 평온하고 활기찬 산티아고(Santiago)(20191102)

경계넘기 2019. 11. 8. 09:42

정상 간 국제회의인 APEC 취소 사태까지 부른 칠레 시위의 중심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다소 긴장되는 길이다. 단순한 여행자라면 당연히 가지 말아야 하는 곳이지만 연구자로서의 욕심은 나를 그곳으로 이끌고 있다.

 

지금 산티아고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는 단순한 반정부 시위가 아니라 어쩌면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주도하던 좌파정권이 시장에 대한 개입을 배제하려는 신자유주의 우파정권으로의 교체가 있었던 남미국가들에서 다시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이미 칠레 시위는 며칠 전에 끝난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좌파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데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기도 하다.

 

아르헨티나 멘도사에서 칠레의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이라 나름 흥미로울 것 같지만 밤버스를 탄 나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저녁 11시 버스가 출발해서 가로등이 켜 있는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창밖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버스도 이내 소등을 하고 나 역시 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새벽 2시 반쯤 버스 창밖으로 환한 불빛이 들어온다. 직감적으로 국경의 출입국관리소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근데 칠레 입국장이다. 이곳 국경에서는 아르헨티나 출국심사는 하지 않나 보다. 칠레의 입국심사는 검역이 철저하다.

 

하지만 입국 심사관들의 모습이나 말에서 칠레 시위에 대한 우려나 걱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통상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무심히 도장을 찍어 준다. 그런 일상적인 모습이 오히려 안심을 준다.

 

새벽 630분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의 산티아고는 무척이나 쌀쌀했다. 마치 초겨울 날씨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위도의 멘도사에서도 아침에 이렇게 쌀쌀하지는 않았는데.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이 서쪽보다 쌀쌀하나 보다.

 

터미널 주변에는 시위의 흔적이 없었다. 일단 이곳은 안전해 보였다. 센트로로 가려고 버스를 타려 했으나 이곳도 교통카드가 있어야 탈 수 있었다. 터미널 주변을 둘러봐도 교통카드를 살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지하철을 타고 가라고 한다. 그래 지하철역에 가면 교통카드도 파는 곳이 있으리라. 하지만 지하철역은 닫혀 있었다. 혹시 시위 때문에 지하철역이 폐쇄된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역 주변이나 버스 터미널과 연결된 지하철 입구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나가는 경비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지하철역은 8시에 연단다.

 

터미널에서 8시까지 기다렸다 지하철을 타고 센트로로 향했다. 지하철이 운행되는 것으로 봐서 일단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우리가 머물 숙소는 일부러 센트로에 있는 곳으로 정했다. 산티아고의 시위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부터 시위는 하지 않을 터이니 서둘러 숙소에만 들어가면 숙소에서 산티아고의 시위 현황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숙소의 가장 큰 장점이 6층에 넓은 베란다가 있어서 조망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숙소까지 무사히 오긴 했는데 숙소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아르마스(Armas) 광장은 하루 종일 너무나 평온했고, 오히려 거리공연 등으로 활기찼다. 스트리트 댄스 공연을 하는 곳에서는 가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챔피언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체크인을 할 때 직원에게 슬쩍 상황을 물어보아도 오히려 직원은 뭐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는 표정이다. 숙소 직원은 우리에게 시위는 평화롭고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그저 저녁에 시위 현장에만 가지 않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해 준다.

 

너무나 평온한 금요일 오전의 모습에 우린 짐을 숙소에 놓고 거리구경도 할 겸 한국 가게들이있는 곳을 걸어가 보았다. 한국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센트로를 관통해서 가는 중심도로들인데 거리마다 이것저것 잡동사니들을 파는 좌판 행상들과 행인들로 걸어가기도 힘들었다. 그들의 모습이나 표정 어디에도 시위를 걱정하는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한국인 가게에서 라면을 사면서 교민들이 하는 이야기를 좀 듣고 나서야 이곳이 시위의 현장임을 조금 감지할 수 있었다.

 

한 교포 청년 한 분이 가게에 들어서자, 가게 사장님이 그 청년에게

가게 문 열었어요?”

열었죠.”

별일은 없구?”

, 장사할 만은 해요

 

전쟁터로 가는 종군기자 마냥 잔뜩 긴장했던 내가 민망스러워진다. 평화로운 산티아고의 풍경에 나 역시 긴장이 풀려서 한식당을 발견하고는 아순시온의 한식당이 생각나서 김치찌개를 시켜 먹었다. 한식당에는 칠레 현지인들로 가득 차서 거의 자리가 없었다. 아순시온의 한식당보다는 맛은 좀 떨어지고, 가격은 비싸긴 하지만 현지인들이 몰려와서 한국음식을 맛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한국 음식까지 먹고 나니 이제 산티아고의 시위에 대한 걱정은 봄볕에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생생한 시위 현장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생긴다.

 

센트로에서 중앙시장을 거쳐 한국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의 거리에는 시위의 흔적조차도 찾기가 어려웠다. 아침에 지하철역에서 숙소 오는 길에 길목마다 있던 바리케이트가 그나마 여기가 시위 현장임을 보여줄 뿐이었다.

 

산티아고에는 우리 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대충 둘러봤는데도 한국 상점들이 여러 개 눈에 보였다. 한식당도 한국치킨집도 있었다. 일부러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그저 길을 걷는데 보인 것들이었다.

 

한국 가게에서 사들고 오는 신라면과 비빔라면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했던 우리의 모습을 쑥스럽게 만든다.

 

평화로운 산티아고와 잔뜩 긴장했던 어느 여행자가 공존했던 하루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