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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 여행/아르메니아(Armenia)

D+120, 아르메니아 예레반 15: 오페라와 함께한 예레반(Yerevan)의 마지막 밤(20190314)

경계넘기 2020. 8. 5. 11:38

 

 

오페라와 함께한 예레반(Yerevan)의 마지막 밤

 

 

오늘은 예레반(Yerevan)을 정리한다.

 

내일 보름 가까이 있었던 예레반을 떠나니 정리할 게 많다. 우선 킬리키아(Kilikia) 버스 터미널에 가서 내일 조지아 트빌리시(Tbilisi) 갈 버스를 예약하러 간다. 11시쯤 호스텔을 나섰는데 상쾌한 기분이 든다. 어제와 같은 그런 일상의 기분이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킬리키아 버스 터미널에 가는 길은 이제 훤하다. 걸어서 한 30분 거리다.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갈까 생각했는데 그냥 커피 한 잔 사들고 음악이나 들으며 걷기로 한다.

 

킬리키아 버스 터미널이 예레반의 센트럴 터미널에 해당한다. 하지만 많이 허접하다. 삼각형의 외형이 그럴 듯해 보이는 건물인데 막상 들어가면 썰렁하다. 오히려 밖이 더 부산스럽다. 조지아 트빌리시(Tbilisi)로 가는 버스를 운행하는 회사 사무실도 건물 안이 아니라 터미널 건물을 마주 보고 왼쪽 바깥에 있다. 버스 탑승대가 있는 곳이다.

 

 

 

버스 요금은 7000드람.

 

오전에는 830. 1030분 이렇게 있다고 한다. 오후에도 한 대가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이 기억이 안 난다. 1030분 버스로 샀다. 예레반에서 트빌리시까지는 6시간 정도 걸리니 대략 오후 4시 반쯤 도착할 것 같다.

 

트빌리시에서 예레반으로 오는 버스는 여러 군데서 출발하는 것 같은데 여행자들이 주로 타는 곳은 트빌리시 중앙역(central station)이나 아브라바리(Avlabari) 메트로역에서다. 두 곳의 회사가 다른데 트빌리시 중앙역에서 출발한 차는 예레반 중앙역에 내리고, 아브라바리 메트로역에서 출발한 차가 여기 킬리키아 버스 터미널로 온다.

 

내 경우 트빌리시에서 예레반으로 올 때는 중앙역에서 타고 왔었다. 블로그에서 말하던 대로 차가 많이 낡았다. 반면에 아브라바리에서 출발하는 차가 훨씬 깨끗하고 정시 운행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갈 때는 킬리키아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려고 하는 것이다. 기차역보다는 조금 더 가깝기도 하고.

 

언제나 떠나는 차편을 사면 이제 정말 떠나는구나 싶어진다. 오는 길도 걸어서 오기로 한다. 하늘은 비록 흐렸지만 날은 따뜻하다. 올 때는 한술 더 떠서 강변길로 해서 왔다. 오다가 강변 공원에 앉아 있는 패트릭을 봤다. 그놈은 매일 일상을 즐긴다. 좋겠다. 그런 일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지나친다. 나중에 그러는데 패트릭도 나를 봤단다.

 

 

 

다음으로는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간다.

 

오전에 커피 살 때 보니 옆에 있는 미용실에서 남자들이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손님이 많은 것을 보니 잘 자르는 것 같아서 거기로 가기로 했다. 태국 람빵(Lampang)에서 머리를 자르고 이번 여행의 두 번째 머리를 자른다.

 

가격을 먼저 물어보니 3천 드람이란다. 비싸지는 않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미용사 분은 영어를 전혀 못하셔서 손님처럼 보이는 한 여자 분이 대신 영어로 물어봐 주신다. 이 가격에 머리도 감겨주고 매우 정성껏 잘라준다. 오죽하면 머리 자르고 팁으로 천 드람을 드렸을까! 태국에서는 안 주었는데. 머리도 나쁘지 않다. 아르메니아 스타일 같기는 한데 괜찮다.

 

 

 

머리를 자르고 오페라 티켓을 사러 갔는데 점심시간이라고 닫혀 있다. 오후 2시부터 3시가 점심시간이다. 아르메니아는 일상이 늦게 시작한다. 아침도 늦게 시작하고. 그렇다고 저녁에 늦게 끝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저녁은 정상대로 끝난다. 살기 좋은 나라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와서 내가 게을러진 것은 아니다. 이곳의 생활이 다른 나라보다 한, 두 시간 늦다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늦어졌을 뿐이다. 하다못해 호스텔 조식이 9시부터 제공된다. 다른 나라는 보통 7시나 8시부터 제공되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이 호스텔만 늦는 줄 알았다.

 

항상 가던 식당에서 점심을 한다.

 

2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빈자리가 없다. 줄도 길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지금이 한참 점심시간이다. 패트릭이 알려준 이 식당 덕에 잘 먹는다. 이곳은 뷔페처럼 다양한 음식들이 있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가리키면 접시에 담아 준다. 담은 음식에 따라 가격이 나온다. 일종의 주문 식단제. 음식이 다양해서 입맛에 맞는 것을 편하게 담아 먹는다. 가끔 새로운 것도 시도해보면서. 가격도 대략 4~5천 원 정도 나온다. 양도 많다.

 

요즘 포크와 나이프만을 사용해서 밥 먹는 것을 연습한다.

 

처음에는 수저를 사용했는데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기로 한다. 패트릭을 보니 포크와 나이프만으로도 음식을 신기하게 잘 먹는다. 하다못해 볶음밥도 아주 깨끗하게 먹는 것을 보고 놀랐다.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스테이크나 스파게티 같은 음식이라면 모르지만 밥 종류나 여타 음식들을 포크와 나이프만으로 먹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남들이랑 먹을 때는 속도를 맞추어야 하니 수저를 사용하거나 포크를 오른손에 쥐고 먹는데, 혼자 먹을 때는 왼손에 포크, 오른손에 나이프를 고수한다. 하다 보니 나름 재미있다. 서양인들이 동양에 와서 젓가락질 배우는 기분이 이런가 보다.

 

 

 

티켓은 지난번과 같은 자리를 산다.

5천 드람. 앞에서 3번째 줄이다. 버스표도 사고, 머리도 깎고, 오페라 표도 사니 지갑은 가벼워져도 마음은 뿌듯하다.

 

숙소에 오니 한국인 여자 여행객이 방에 있다. 내일 간다니까 한국인이 왔다. 작년 중국 다리(大理) 이후로 숙소에서 처음 보는 한국인이다. 지금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같이 잠시 숙소를 나와서 예레반 정보를 알려줬다. 슈퍼, 정류장, 그리고 중요 명소 등등.

 

저녁에 패트릭과 오페라 하우스로 갔다.

 

오늘 오페라는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모두 4막으로 되어 있는 이 오페라는 저녁 7시에 시작해서 10시 다 되어 끝난다. 오페라가 하는 동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예레반의 마지막 밤. 난 비 속의 예레반에서 비극의 오페라를 보고 있다.

 

이 오페라는 여주인공, 고급 창녀인 비올레타 발레리의 역할에 역량이 달려있다고 한다. 그만큼 극 전반을 통해서 여주인공의 노래는 끝없이 메아리친다. 보통의 성량과 체력이 아니면 지탱하기 힘들겠다 싶다. 그런데 비올레타를 맡은 아르메니아의 성악가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젊은 연인의 사랑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인 조르주 제르몽 역을 맡은 성악가는 오페라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내공이 엄청나다. 노래에 그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막이 내리고 배우들이 인사를 할 때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가 등장할 때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나 보다. 옆에 있던 패트릭도,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 배우가 나오자 자리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다.

 

오페라가 끝나고, 비가 내리는 오페라 하우스를 나오는데 묘한 여운과 감흥이 가슴을 들뜨게 한다. 예레반에 와서 클래식의 감동과 재미를 배운다. 물론 예레반이라는 낯설고 색다른 장소가 주는 몫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문화예술의 도시 예레반의 마지막 밤 치고는 괜찮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패트릭이 포도주로 조촐한 내 이별 파티를 해준다.

 

나와 패트릭, 그리고 중국인 친구, 카타라는 일본인 친구, 한국인 여자 여행자가 전부이지만 이렇게 이별 파티를 같이 해주니 감사하다.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아쉬워지는 밤이다.

 

여기가 좋은 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더 좋은 곳이 나오면 어떡하느냐고 패트릭이 묻는다. 가면 갈수록 더 있고 싶어지고 떠나기 싫어지고. 바쿠가 그랬고, 예레반이 그랬다. 과연 트빌리시는 어떨까? 벌써부터 걱정 아닌 걱정이 든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