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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 여행/불가리아(Bulgaria)

D+179, 불가리아 벨리코 투르노보 3: 차레베츠 요새를 걸으며 (20190512)

경계넘기 2020. 10. 19. 08:18

 

 

차레베츠 요새(Tsarevets Fortress)를 걸으며

 

 

아침부터 서둘러 차레베츠 요새(Tsarevets Fortress)를 향한다.

 

물론 커피와 맥주도 잊지 않는다. 가지고 다니는 보온병에 숙소에서 제공하는 커피를 담고, 맥주는 숙소 근처 매일 가는, 이제는 가게를 보는 두 모녀가 내 얼굴을 알아본다, 구멍가게에서 두 캔을 담는다. 빵도 보여서 주워 담는다.

 

오늘은 아침부터 티켓 검사 아저씨가 나와 계신다. 어제가 이상한 날이었겠지. 티켓을 파는 아주머니도, 티켓을 검사하는 아저씨도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보신다. 아시아인이 많지 않은 도시라 그런 모양이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아무에게나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가끔 중국인이냐고 툭 물어봤다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반색을 하는 경우를 봐왔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그다지 부정적인 이미지가 없다는 정도로만 해석한다.

 

예전에는 한국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기도 했다.

 

잘 모르니 할 이야기도 없고 하니 그냥 엄지손가락 한 번 들어주는 식이었다. 20여 년 전 호주에 있었을 때다. 백호주의가 철폐되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잠재되어 있는 그곳에서 여행을 하다가 잠시 들린 한 시골 기차역에서의 일이다. 대낮부터 술에 취한 한 아저씨가 열차 플랫폼에서 나를 보고는 욕을 해댔다. 나를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생각한 아저씨는 아는 지식을 다 동원해서 중국과 일본 욕을 해대고 있었다.

 

한참 듣고 있다가 내가 한 마디 던졌다. 난 한국인이라고. 그 아저씨 반응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Korean! Korean......” 한국인, 한국인만 반복하다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곧 지나갔다. 한국을 싫어하지 않는다기보다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욕을 못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생각을 짜내는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나가면서도 계속 혼잣말로 korea, korea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지금은 좀 다르다.

 

젊은 여자들은 한국의 드라마, 영화 그리고 가수와 배우들을 많이 알고 있고, 젊은 남자들이나 아저씨들은 삼성과 현대 등을 말한다. 요새는 한술 더 떠서 서양친구들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서울이냐고 한 번 더 묻는다. 그만큼 한국 그리고 서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요새 입구에서 만난 한 아저씨도 중국인이냐고 물었다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삼성, 현대 등을 이야기했다. 퉁명스럽게 중국인이냐고 물었다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얼굴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현상은 터키가 아주 심하다. 한국인이라면 바로 형제의 나라(brother country)’가 나오니 말이다.

 

근데 요즘 한민족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BTS도 문재인 대통령도 아니고 북한의 김정은이다.

 

얼마나 뉴스에 많이 나온 것인지 김정은발음도 정확히 구사하는 사람이 곧잘 있다. 김정은에 대한 반응은 나라에 따라 극과 극이다.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들-중동, 구공산권 국가들-의 사람들은 미국과 맞장 뜨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고, 미국과 서유럽 등의 서방국가들에서는 사이코 아니냐고 한다.

 

이른 아침 서둘러 올라온 차레베츠 요새에는 사람이 없다.

 

거의 내가 일착인 듯하다. 오늘은 차레베츠 요새를 실컷 걸으며 경치 좋은 곳에서 멍도 때릴 생각이다. 요새 안의 허물어진 담장 위에 앉아서 그 옛날 이곳의 화려했던 시대를 상상해본다. 이 성과 맞은편 언덕 위에도 성이 있고, 성들 안에는 집들과 성당, 상점들이 많이 있었으리라. 내가 지금 앉아 있는 허물어진 담장도 어느 상점, 어느 집 또는 어느 성당의 담이었을 것이다. 내가 앉아 있는 담장 옆 큰길에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길을 걷고, 아이들은 뛰어 다니며 놀고, 때론 마차가 때론 말을 탄 기사들이 지나다녔을 것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그저 허물어진 돌담과 길의 흔적만이 남아서 이름 모를 들꽃과 잡초 그리고 도마뱀만이 그 위에서 뛰놀고 있다.

 

 

 

요새 안의 숲 산책길이 가장 맘에 든다.

 

길이는 한 5백여m로 걸으면 10~15분밖에 걸리지 않는 길이지만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그곳에 인적이라곤 나밖에 없어서 좋다. 나무의 싱그러운 향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는 그 길을 반복해서 걷다가 나무 사이로 보이는 얀트라(Yantra)강을 보곤 한다.

 

 

 

숲속 길이 끝나는 길에 지금은 쓰지 않는 작은 분수대가 있다.

 

그곳의 전망이 좋아서 맥주를 마시며 굽이쳐 흐르는 얀트라강과 그 주변의 우거진 수풀을 본다. 그러다 또 그곳에서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고 때론 수영도 하곤 했을 옛 시절의 사람들을 그려본다.

 

 

 

이 도시가 로마인들에 의해 건설되고, 이후 제2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다가 이후 오스만 제국에 지배를 받았으니 이곳 강가에 있었던 그 옛 사람들도 로마인, 불가리아인, 투르크인 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찬란했던 로마 제국도, 오스만 제국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허망한 것이 역사다.

 

같은 강, 같은 산이지만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서 달랐고, 지금은 머나 먼 극동의 한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 이곳을 거닐고 있다. 역사란, 사람이란 흐르는 얀트라의 강물과 같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임을 느낀다.

 

성을 몇 바뀌나 돌았는지 모른다.

 

돌다 힘들면 전망 좋은 그늘 아래 앉아서 커피나 맥주를 마신다. 탑 돌기를 넘어서 성 돌기다. 성 밟기라고 해야 하나. 무슨 소원을 비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성을 돌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본다.

 

 

 

내일이면 이번 여행도 만 6개월이 된다.

 

작년 1115일에 여행을 시작해서 오늘로 179. 내일이면 꼭 180일이다. 6개월이란 시간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 돈도 계획도 제대로 없이 무작정 떠난 이번 여행에서 1차 목표가 6개월이었기 때문이다. 6개월은 해야 그나마 세계여행 했다고 말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멀게 만 느껴졌던 6개월이 그새 코앞에 왔다.

 

내 길을 찾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었다. 6개월 동안 꾸역꾸역 이곳까지 왔지만 내 길은 아직 모르겠다. 성을 걷고 또 걸어보아도 그 답은 찾을 길이 없다. 그저 이번 여행을 끝마칠 즈음에는 내 길을 찾을 수 있기를 타국의 성을 돌면서 빌어 본다.

 

 

 

차레베츠 요새는 나의 여행과 삶을 돌아보는 시간도 갖게 해준다. 이곳에 오시는 분이 있다면 성 안 뒤편에 있는 숲길을 꼭 찾아 걸어보시길 바란다.

 

이른 아침에 들어간 성에서 오후 늦게야 나온다.

성 아래 강가에 난 길을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여기도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내일 이곳을 떠나 루마니아로 간다.

 

짧은 불가리아의 일정이었지만 이곳 벨리코 투르노보와 차레베츠 요새는 나에게 충분히 강한 인상을 주었다. 특히, 천 년의 고성 위에서 내 6개월의 여행을 반추할 수 있어서 더욱 감사하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