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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9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4: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상흔 in 베오그라드 1 (20190526)

경계넘기 2021. 12. 17. 10:39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상흔(傷痕) in 베오그라드(Beograd) 1

 

 

베오그라드(Beograd)19993월에서 6월까지 나토(NATO)의 공습을 받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서울의 명동과 같은 중심 상업거리인 크네자 미하일라(Kneza Mihaila) 거리에는 일요일 오후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어김없이 거리에는 버스킹 공연과 마술공연 등이 사람들의 흥을 돋우고 있다. 활기차고 평화로운 모습. 그 어디에도 20년 전 있었던 공습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상흔(傷痕),
폭격 맞은 구(舊) 국방성과 육군 본부 건물

 

 

 

하지만,

 

크네자 미하일라 거리에서 공화국 광장(Republic Square)을 거쳐 조금만 내려오면 공습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들이 나온다. 도로를 사이로 나란히 있는 두 건물은 공습을 받아 허물어지고 뼈대만 남은 모습을 여태 간직하고 있다.

 

담담하게 글을 쓰고 있지만 처음 그 건물을 볼 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폭격 현장을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그 곳이 번화한 도심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속된 말로 삑사리 한번 나면 수많은 시민들이 죽는다. 군대를 다녀왔다지만 전쟁의 참상을 CNN의 뉴스 속에서나 봤던 전후 세대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해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철거하려고 했지만 수많은 사진 기자들과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그냥 베오그라드의 랜드마크로 두었다고.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려는 것인지 그날 나토군의 공습을 기억하자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관광 자원이 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나도 이렇게 찾아왔으니 말이다.

 

 

 

두 건물은 예전 세르비아 국방성과 육군 본부 건물이다.

 

폭격 맞은 건물의 한쪽에는 여전히 세르비아 국방성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 한쪽 건물의 벽면을 세르비아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거대한 플래카드가 덮고 있는데 아마도 그곳이 현 세르비아 국방성 건물이 아닐까 싶다.

 

 

 

 

코소보 전쟁(Kosovo War)
그 속의 잔인한 전쟁 범죄,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

 

 

 

베오그라드에 대한 공습은 세르비아의 질긴 저항 속에서 코소보(Kosovo)에 대한 공격과 잔인한 학살을 하루빨리 종결짓기 위한 미국과 나토(NATO)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코소보 전쟁에서도 다시 잔혹한 집단 학살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1991년에 슬로베니아(Slovenia), 크로아티아(Croatia),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 1992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가 독립하여 나가자 유고슬라비아 연방에는 세르비아(Serbia)와 몬테네그로(Montenegro)만 남게 되었다. 남은 두 나라는 1992427일 신()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수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출처: Wikipedia)

 

이 무렵 세르비아의 남서쪽에 위치한 코소보에서도 독립 움직임이 일어났다. 코소보는 무슬림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세르비아에 속해 있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독립 요구에 세르비아는 강경했다. 1995년부터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 해방군(KLA, Kosovo Liberation Army)을 조직하면서 세르비아 경찰과의 산발적인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무력 충돌의 양상이 커지자 19985월 신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코소보 해방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계가 주축인 연방군은 비무장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을 벌여 조직적인 집단 학살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조직적인 강간과 성폭력을 광범위하게 일으켰다. 격분한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 해방군에 대규모로 참여하면서 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코소보 전쟁 (출처: 한겨례)

 

미국과 유럽연합은 전쟁 개시 한 달 만에 세르비아를 맹비난하면서 코소보에서의 연방군 철수와 집단 학살 중단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와 함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다양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이를 무시하고 전쟁과 학살을 지속하자 이듬해인 1999324일 나토는 신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나토의 공습은 611일까지 총 78일간 진행되었다.

 

지상군의 투입은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인명 피해를 낼 수 있기 때문에 공습을 선택했다. 공습이 가져오는 파괴력과 공포도 엄청나기 때문에 전쟁 억지력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저항은 완강했다. 공습 일주일 정도면 세르비아가 손을 들고 나올 줄 알았다. 신유고슬라비아 한쪽 연방을 이루던 몬테네그로는 몇 번의 공습으로 항복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세르비아의 심장 베오그라드였을 것이다.

 

 

나토의 세르비아 공습 (출처: Wikipedia)

 

지금 마주하고 있는 옛 세르비아의 국방성과 육군 본부가 그때 공습을 받은 것이다.

 

오늘은 2019526. 공습은 지금부터 딱 20년 전의 일이다. 3월에 시작한 공습이 6월에 끝났으니 20년 전 오늘 베오그라드는 한창 공습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참혹함이 들기도 하지만 일면 통쾌함도 든다.

잔혹한 전쟁 범죄에 대한 응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더욱이 세르비아에 의한 민간인 집단 학살은 코소보 전쟁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음에 이어서......

 

 

D+19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5: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상흔 in 베오그라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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