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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9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5: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상흔 in 베오그라드 2 (20190526)

경계넘기 2021. 12. 17. 11:27

 

D+19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4: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상흔 in 베오그라드 1

 

D+19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4: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상흔 in 베오그라드 1 (20190526)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상흔(傷痕) in 베오그라드(Beograd) 1 베오그라드(Beograd)는 1999년 3월에서 6월까지 나토(NATO)의 공습을 받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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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상흔(傷痕) in 베오그라드(Beograd) 2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보스니아 전쟁(Bosnia War)

 

 

 

코소보 전쟁에서 미국과 나토의 개입은 이전 다른 유고슬라비아 전쟁들에 비해서 신속하고 단호했다. 특히 1992년에서 1995년에 있었던 보스니아 전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마도 보스니아 전쟁이 미국과 나토에게 선행 학습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19916월에 시작한 슬로베니아와의 전쟁이 단 10일 만에 끝나고 유고슬라비아는 바로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1992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와의 또 다른 전쟁을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출처: Wikipedia)

 

보스니아의 민족과 종교 구성은 유고슬라비아 연방 주에서도 가장 복잡했다.

 

무슬림 보스니아인(44%), 정교회 세르비아인(32.5%) 그리고 로마가톨릭 크로아티아인(17%)이 보스니아 내에 섞여 살았다. 복잡한 민족 구성은 언제든 갈등이 불거질 잠재적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보스니아 전쟁은 199233일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반발하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가 반발하면서 촉발되었다. 동년 46일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계 민병대 뒤에는 유고슬라비아 특히 세르비아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보스니아 전쟁 중의 사라예보 (출처: Wikipedia)

 

크로아티아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집단 학살의 망령이 살아났다.

 

특히 보스니아 전쟁에서 심했다. 보스니아에서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주도 아래 비무장 무슬림 보스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인종 청소가 일어났다. 무슬림 보스니아인에 대한 잔혹한 집단 학살과 이들 여성들에 대한 집단 강간과 성폭력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때때로 크로아티아계도 보스니아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 전쟁에서의 집단 학살 (출처: cbsnews)
보스니아 전쟁에서의 집단 학살 (출처: cbsnews)

 

1995년 들어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수세에 몰리며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보스니아인에 대한 집단 학살은 더욱 극심해지고 악랄해졌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스레브레니차 학살(Srebrenica Massacre)이었다. 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동부의 작은 도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장악한 지역에 있었지만 당시 유엔 평화유지군이 지키고 있는 안전지대였다. 하지만 19957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공격해 도시를 장악하고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만여 명의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일으켰다. 당시 이 도시를 지키던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은 자신들의 기지로 피신한 시민들을 민병대에 내주는 일까지 있었다.

 

 

스레브레니차 (출처: cbsnews)
스레브레니차에서 유엔군과 시민 (출처: cbsnews)
스레브레니차 추모 공원 (출처: 연합뉴스)

 

21세기를 목전에 둔 국제 사회는 더 이상 잔혹한 집단 학살의 망령이 인류사에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역사 속에 꼭꼭 묶어 두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살아 현실에 나타나자 세계는 경악하고 치를 떨었다. 보스니아 전쟁을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과 나토 등 서방 세계의 대응은 무척이나 느렸다.

 

나토가 세르비아계 민병대에 공습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은 1995830일의 일이다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난 시기가 19924. 전쟁의 시작과 함께 집단 학살과 강간의 인종 청소가 유럽 땅에서 일어났지만 3년이 훌쩍 넘은 1995830일까지 서방 국가들은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어지는 한 달 간의 공습으로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은 종전을 맞았다. 그렇게 쉽게 끝낼 일을 질질 끌면서 잔혹한 집단 학살의 피해자만 키웠다. 서방 국가들에게 집단 학살을 방조했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도 일견 당연해 보인다.

 

 

보스니아의 UN 평화유지군 (출처: wikipedia)

 

미국과 나토가 잔혹한 전쟁 범죄들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개입을 주저했던 가장 큰 이유가 보스니아인들이 무슬림이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유럽에 무슬림의 나라를 세워줄 수는 없었다나 뭐라나. 설마 그럴까 싶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가장 중요한 배경에도 로마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무슬림의 종교적 갈등이 있었으니 종교의 잔혹함과 비정함이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코소보 전쟁에서는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이 무슬림임에도 미국과 나토가 나름 신속하게 대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듯 20세기 말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전쟁의 한가운데 세르비아가 있었다.

세르비아인이 무척 호전적이고 배타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이유다.

 

베오그라드의 거리를 걷다보면 문득문득 몇 가지 상념이 젖어든다.

 

이토록 평화롭게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 학살과 집단 강간과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조직적으로 저지를 수 있었을까?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를 다는 순간 순진무구하던 개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인간 백정들로 변하곤 한다. 여기에 종교까지 더하면 답이 없어 보인다. 도대체 국가와 민족 그리고 종교가 무엇이기에?

 

비록 세르비아인에 대한 선입견들은 사라졌지만 전쟁과 평화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고민은 이곳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부터 발칸을 여행하는 내내 떠나지 않을 것 같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