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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11, 체코 프라하 1-3: 프라하의 봄, 바츨라프 광장 (20190613)

경계넘기 2022. 5. 6. 16:19

 

 

프라하의 봄, 바츨라프 광장(Wenceslas Square)

 

 

구시가지를 둘러보러 숙소를 나선다.

 

오후 6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아직 대낮처럼 훤하다. 쉬고 싶지만 프라하(Praha)23일만 머문다. 와중에 오는 날, 가는 날 제외하면 온전한 날은 내일 하루뿐. 시간 있을 때 열심히 봐 두어야 한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인지라 프라하(Praha)에 대한 간략한 한글 안내문을 준다. 프라하 구시가지를 둘러보는 핵심 루트가 있다. 이걸 따라가 보기로 한다. 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정보가 이동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럴 때 이런 현지 정보는 매우 값지다. 산책을 시작하기 전 마트에 들러 맥주 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체코 역시 독일과 함께 맥주의 본고장 아닌가!

 

 

프라하 국립박물관
National Museum, Praha

 

 

웅장한 자태의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이 처음 나를 맞는다.

자연사 박물관. 체코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란다. 자연과학(광물학, 동물학), 고고학, 예술 등 천만 여개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고.

 

건물 자체도 화려하고 웅장하다. 체코의 저명한 네오르네상스(neo-renaissance) 건축가인 요제프 슐츠(Josef Schulz)1891년에 건축한 건물이란다. 그러니 당연히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겠지. 확인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에 폭탄을 맞아 피해를 입었고, 프라하의 봄이었던 1968년에는 소련군이 이 건물을 향해 기총 사격을 해서 전면부가 많이 파손되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두 번의 사건에도 유물들은 안전 수장고에 보관되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현재 다 복구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계속 공사 중이다.

 

2011년부터 리뉴얼 공사 중이라고 한다. 지금은 내부 공사 중으로 보인다. 개관 예정은 2020년 봄이라고. 빈에서 미술사 박물관(Wien Museum of Art History)만 보고 시간이 없어서 못간 자연사 박물관의 한을 여기서 풀어볼까 했는데 아쉽다. 유물들은 신관으로 옮겨서 전시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보고 싶지는 않다. 다음에 제대로 개관하면 그때 이 건물 안에서 보고 싶다.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 바츨라프 광장(Wenceslas Square)

 

 

국립박물관 앞에 말을 탄 바츨라프 동상(Pomník svatého Václava)이 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보헤미아의 공작이자 기독교 성인으로 추앙받는 바츨라프 1(Václav I)라고 한다. 동상 자체도 체코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 작품 중 하나라고. 제작 기간도 길어서 1887년에 시작해서 1924년에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바츨라프 동상 앞으로 바츨라프 광장(Wenceslas Square)이 이어진다.

 

광장의 이름은 당연히 바츨라프 1세의 이름을 땄다. 그의 동상이 광장을 굽어보고 있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관문이자 신시가지의 중심 바츨라프 광장은 프라하 국립박물관에서 시작하는 길이 750m, 60m의 도로이자 광장이다. 광장 양편으로 다양한 상점과 레스토랑, 호텔 등이 있는 번화한 상업 지구다.

 

 

 

사실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 민주화의 성지다.

 

무심하게 지나치기 싶지만 바츨라프 광장은 1968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으로 대변되는 체코 민주화의 성지다. 마치 한국 광주의 금남로나 서울의 광화문 광장과 같은 곳이다.

 

동상 앞, 광장 초입의 작은 화단에 추모패가 있다.

 

화단 너머로 프라하 국립박물관과 바츨라프 1세의 동상을 사진에 담으려 하니 양초로 둘러싸인 무언가가 화단 바닥에 보인다. 들여다보니 두 청년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추모의 패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구시가지를 걸어보려 했는데 두 청년의 추모패가 여행객의 발길을 잡는다.

 

 

 

프라하의 봄에 구()소련에 저항해 분신한 청년들이다.

 

왼쪽이 1969119일에 분신한, 당시 칼름 대학 대학생이던 얀 팔라흐(Jan Palach). 오른쪽이 당시 철도대학 대학생이었던 얀 자이츠(Jan Zajíc). 얀 팔라흐에 이어 동년 225일 분신했다. 그들이 분신했던 장소가 추모패가 있는 바로 이곳이다. 한국에서 전태일 열사가 노동개혁을 부르짖으며 분신했던 1년 전의 일이다.

 

 

 

대체 프라하의 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68년 새해 휴가가 막 끝난 14일의 일이다.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란 인물이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시 공산당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지도자의 변동이 서민들에게 주는 의미는 크지 않았다. 사실 기대하는 바도 크지 않았을 것이다. 투표로 선출되는 것도 아니고 그들끼리의 권력 변동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두브체크에게서 뭔가 다른 움직임이 나타났다.

 

봄의 막 시작하는 3월의 어느 날 두브체크가 갑자기 신문 검열을 폐지하더니만 친공산당 보수파 계열의 내무장관과 검찰총장을 해임시켜 버렸다. 봄의 기운이 완연한 4월에 들어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개혁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더니 비밀경찰의 권한을 제한하고 서방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도 나섰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틀을 벗어나 소비재 생산을 강조하고, 급기야 다당제와 민주적 선거의 가능성까지 열어 두었다. 두브체크는 이를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고 말하며 공산당 지도하에 민주화를 추진했다.

 

따뜻한 계절의 봄 속에 푸근한 정치적 봄마저 프라하를 감싸 안았다. 기지개를 펴던 시민들 사이에 자유의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때를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른다. 1968년 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시기.

 

 

 

Winter is coming!

미드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에 나오는 대사다.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체코 민주화의 파고가 자국에 밀려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6월에 들어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체코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군사 훈련을 가장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무력시위 속에서 소련은 체코와의 협상을 통해 체코의 민주화 개혁을 저지하려 했다.

 

회담을 통한 통제가 여의치 않아지자 소련은 군사작전에 돌입했다.

 

1968820일 밤, 바르샤바 조약군(소련,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이 기습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20만의 병력과 2천 대의 탱크가 동원된 전면전이었다. 전격적인 기습 작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병력은 이렇다 할 저항도 제대로 못했다. 다음날 아침 프라하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전 지역이 바르샤바 조약군에 떨어졌다. 두브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수뇌부는 조약군의 전격적인 작전이 있던 당일 20일 밤에 체포되어 다음날 모스크바로 압송되었다.

 

 

 

바르샤바 조약군에 프라하 시민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하지만 조약군의 무력 진압으로 프라하에서만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때 프라하 국립박물관이 소련군의 기총 사격을 받아 심각하게 파손되었다. 그리고 10월 중순에는 조약군 7만 명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영구히 주둔한다는 군사주둔협정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 소식에 시민들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졌다. 조약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시위(10~12월)를(10~12월) 기점으로 학생 시위도 연이어 이어졌다. 시위가 격렬해지는 과정에서 1969119일 칼름 대학 대학생 얀 팔라흐가 분신을 했고. 뒤이어 철도대학 대학생 얀 자이츠가 같은 길을 걸었다.

 

겨울은 끝내 봄을 밀어냈다.

 

시위가 격화되면 격하될수록 소련은 더욱 강압적으로 억압했다. 소련군의 무력 앞에 저항의 불씨는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19694월에 개혁을 주도했던 두브체크는 좌천되었고, 소련의 후원을 받은 후사크(Gustáv Husák)가 그를 대신해 제1서기장의 자리에 올랐다. 후사크는 소련의 훈령에 따라 개혁파를 철저히 숙청하고 모든 정책들을 개혁 이전으로 되돌렸다. 그렇게 프라하의 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허망하게 스러진 이들 청년들의 죽음은 다시 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다.

 

1989년 고르바쵸프가 등장하면서 소련에서 개혁개방이 추진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희망이 다시 꿈틀 되기 시작했다. 19891월 분신자살한 두 청년을 추도하는 기념집회가 바츨라프 광장의 바로 이 자리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 집회를 기점으로 민주화 시위가 다시 체코슬로바키아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911월 공산당 일당 독재를 종식시키고 체코슬로바키아도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

 

참고로 1980년 서울의 봄은 바로 프라하의 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 광장이 바로 그런 곳이다.

가볍게 산책이나 하려던 여행자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곳.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