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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 이야기 23: 마지막 출근(20221209)

경계넘기 2023. 1. 2. 08:54

 

 

마지막 출근

 

 

오늘은 작업 안할 겁니다!”

 

아침 TBM(아침 조회)을 마치고 작업지휘자가 한 말이다. 어제 하다 만 작업이 있어서 오전에 그 작업을 마무리 지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지 않겠단다. 그렇다면 남은 자재와 물품들을 정리해서 창고로 보내면 모든 일이 끝난다. 마지막 날까지 바쁘리라 생각했는데 다행이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 날이다.

 

우리 팀 전체가 오늘을 마지막으로 청주 하이닉스에서 철수한다. 이 날이 올까 싶었는데 시간이 가긴 간다. 오전에 쉬엄쉬엄 샵장에서 자재와 물품을 화물 엘리베이터 앞으로 모아 놨다. 화물 엘리베이터 사용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관계로 오후에나 사용이 가능하단다. 그럼 그때까지 무얼 할까! 뭐하긴 짱 박혀서 그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거다.

 

5월 말부터 시작했던 노가다 일이 끝난다.

 

다사다난했던 시간이지만 끝을 본다. 그간 함께 했던 동료들은 지랄 맞은 작업지휘자 덕에 대부분 떠나고 팀이라고 해봐야 팀장, 작업지휘자 빼면 몇몇 남지도 않았다. 나 역시 순간순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많았지만 그래도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고 싶었다.

 

오후에 화물 엘리베이터로 자재와 짐을 내리고 대기했던 트럭에 짐을 실었다. 마지막 양중인 셈이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이것마저도 귀찮다. 이걸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팀장이 창고에 가서 짐을 정리해야 한단다. 어차피 이곳에서 퇴근 시간까지 개겨야 하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 싶다. 현장 쓰레기장을 지나면서 너나없이 차고 있던 벨트며 조끼며 장갑 등 개인장구들을 던져 넣었다. 안전모도 던져 버리고 싶지만 안전모는 현장 출입구까지 쓰고 가야 한다.

 

시원섭섭하다!

 

창고에서 실어온 자재와 도구 등을 정리하고 사무실에 와서 출입증을 반납했다. 이로서 모든 일을 끝냈다. 퇴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끝났다.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그새 정이 많이 들었는지 아쉽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이럴 때 쓴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한다. 정말 시원섭섭하다. 싸우기도 많이 했던 작업지휘자와는 더욱 그렇다. 한번 안아 보자고 했다. 체구가 무척이나 작은 친구인데 앞으로는 성격 좀 죽였으면 싶다.

 

 

 

이곳저곳에서 다른 일을 소개시켜 준다는 사람이 많다.

 

작업하며 알게 된 동료들로부터 다음에는 어디로 가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다른 작업지로 떠나는 사람들로부터 같이 가자는 권유도 받았고 청주에서 일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이곳에 아는 팀장들이 있으니 소개를 시켜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싸우면서 정들었던 작업지휘자 친구가 특히 그랬다. 고마운 말들이다. 처음 하는 일이었지만 그간 잘했나 싶기도 해서 스스로 대견하다 싶다.

 

, 근성이 좋아요! 이 바닥에서도 성공할 수 있어

 

함께 일하던 한 젊은 작업자가 한 말이다. 처음부터 쭉 같이 했던 친구인데 나이만 나보다 어렸지 경력이 7~8년 되는 한참 고참이다. 예전에 내게 다음은 어디로 갈 생각이냐고 물으며 한 말이다. 내가 그렇게 근성이 좋은가? 하기는 역마살이 있어서 이곳저곳 떠돌긴 하지만 일이 힘들어서 도망친 적은 없어 보인다.

 

친화력은 발군이에요!”

 

다른 유도원 친구는 나보고 대단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단다. 나이가 많든 적든 대부분 작업자들과 친하게 지낼 뿐만 아니라 이 팀의 빌런이었던 작업지휘자와도 격의 없이 친했던 사람은 나밖에 없단다.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다. 팀장이 짠돌이라 덕분에 내가 술을 사느라 돈이 많이 깨지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 팀 팀원들이 모두 좋았다.

 

내가 성격이 좋다기보다는 같이 일했던 팀원들이 다들 좋았다. 성격만 좋은 게 아니라 하나하나 개성들이 넘치면서 재미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말에는 같이 작업했던 팀원들 모두들 인정을 한다. 망할 놈의 작업지휘자 때문에 다들 안 좋게 떠나긴 했지만. 마지막 날까지 가장 아쉬운 점이 이거다. 다들 남아서 같이 소주 한 잔 하고 헤어졌다면 정말 좋았을 터인데. 그게 가장 아쉽고 아쉽다.

 

 

 

저녁에 다른 작업자 한 명과 뒤풀이를 했다.

 

같이 하기로 했던 두 명이 엊그제 작업지휘자와 싸우고 나가는 바람에 우리 두 명만 남았다. 그렇다고 기념 축하주를 아니 할 수는 없다. 이 친구도 나처럼 노가다 일은 처음 하는 젊은 친구다. 원래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던 친구. 처음 하는 일이었지만 곧 우리 팀의 에이스가 되었던 성실한 친구다. 이 친구는 이 일을 마치고 청주에 개인 작업실 겸 샵을 낼 생각이란다.

 

이 친구와 술 한 잔 하면서 마지막을 정리한다. 정말 다 같이 있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다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만두었던 게 아니어서 작업지휘자만 아니었다면 이 순간까지 같이 있었을 사람들이다. 그들 덕분에 즐겁게 일을 하고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는데......

 

다음 주부터 또 다른 교육이 시작한다.

 

나는 바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 교육이 잡혀 있다. 아쉬움을 달랠 시간도 없다. 2주간의 교육이 끝나면 한국을 정리하고 바로 베트남으로 출국해야 한다. 역마살 인생, 하나가 끝나니 바로 또 다시 이동이다. 그나저나 청주 구경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청주살이라는 게 노가다 이야기밖에 없다.

 

 

by 경계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