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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15, 폴란드 크라쿠프 3-1: 유대인 학살의 현장, 오슈비엥침(Oświęcim, 독일어 아우슈비츠) 1 (20190617)

경계넘기 2023. 2. 1. 05:34

 

 

유대인 학살의 현장, 오슈비엥침(Oświęcim, 독일어 아우슈비츠) 1

 

 

가슴 아픈 인류사의 현장에 간다.

 

오슈비엥침(Oświęcim), 독일어로 아우슈비츠(Auschwitz)라 불리는 곳이다. 크라쿠프(Krakow)에 온 가장 큰 이유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친구 덕분에 소금광산이 급부상하긴 했지만.

 

영화 쉰들러리스트(Schindler's List)’를 참 감명 깊게 봤다.

 

영화 속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나온 시체더미들 속에 있던 빨간 코트의 소녀가 기억에 생생하다. 그 장면에서 화면은 갑자기 흑백으로 전환되고 그 빨간 코트만 컬러로 처리되었다. 흑백 속에서 강렬하게 나타나는 그 빨간 코트의 소녀 그리고 그 아이를 보고 있는 쉰들러. 그 어린 소녀의 죽음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그 영화의 현장이 오늘 가게 될 아우슈비츠다. 아니다. 영화의 현장이 아니라 그 영화의 배경이 된 인류사 비극의 현장이다.

 

 

쉰들러 리스트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조식을 일찍 먹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 해서 조금이나마 한가할 때 그곳을 가려는 이유에서다. 시내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간다. 표를 파는 창구에 줄이 길다. 줄이 길기도 길지만 어제 바벨 성(Wawel Castle) 입장료 창구처럼 도대체 줄지가 않는다. 버스표 하나 파는 것도 세월아 내월아.

 

버스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을 보니 845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 15분 정도 남았다. 그 안에 표를 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버스 기사에게 바로 표를 살 수 있다는 블로그 이야기도 들었고, 또 어제 터미널에 와서 오슈비엥침 행 버스 타는 곳도 알아두었던지라 그냥 바로 버스 타는 곳으로 간다. 어제 버스 일정을 알리는 전광판도 봐두었기 때문에 바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 답사의 힘이 이리 강하다.

 

버스는 작은 승합차. 몇 명 차지 않았지만 시간이 되니 바로 출발한다. 하지만 이 버스 직행이 아니라 그냥 완행이다. 곳곳에 서면서 사람들을 태우고 내린다. 그렇게 1시간 40여분을 달린 버스는 오슈비엥침 입구에 나를 내려준다. 오슈비엥침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다.

 

블로그들에 의하면 오후 3시부터 자유 관람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투어 즉, 가이드와 함께 해야만 입장할 수 있고 개별적으로 자유 관람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전 9시 이전과 오후 3시 이후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매표소에 가니 오후 5시 이후란다. 성수기라 그런 모양이다.

 

투어로 관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보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곳은 자유 관람은 무료인데 투어로 들어가면 투어비로 60 줄러티를 내야한다. 우리 돈으로 18천원이 넘는 돈. 이 비극의 장소를 돈벌이로 이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많이 오다 보니 운영상 그룹 투어 형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가이드 하나 투입하고 수신기 하나 제공하는 것으로 이 돈을 받아가는 것은 장삿속이다.

 

성수기라고 자유 관람시간을 오후 3시에서 5시로 옮긴 것도 좀 그렇다. 어차피 자유 관람도 시간별로 인원수가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일찍 움직인 이유도 되도록 오후 3시에 바로 시작하는 자유 관람권을 받으려고 한 것. 인원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성수기라고해서 사람들이 특별히 몰릴 이유는 없다.

 

 

 

아우슈비츠 대신 오슈비엥침(Oświęcim)라 부르려 한다.

 

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지명이 오슈비엥침이다. 아우슈비치는 독일이 부르는 이름이다. 이곳이 폴란드 땅이고 폴란드는 피해자이니 가해자인 독일이 부르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싶다. 당연히 폴란드 사람들은 이곳을 아우슈비치라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조금 다른 비유긴 하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른다면 우리가 좋아하겠는가!

 

오슈비엥침에는 3개의 수용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제1수용소가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이고, 2수용소는 브제진카(Brzezinka, 독일어로 비르케나우(Birkenau)) 수용소 그리고 인근의 드보리 마을에 제3수용소가 있다. 하지만 편하게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 1수용소, 2수용소, 3수용소라 부른다. 1수용소는 1940, 2수용소는 1941년 그리고 제3수용소는 1942년에 지어졌다.

 

현재 오슈비엥침에는 두 개의 수용소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1수용소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 2수용소 브제진카(비르케나우)가 그곳이다. 아울러 이 두 수용소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1수용소가 투어로만 갈 수 있는 곳이고 제2수용소는 자유 관람으로 무료로 들어간다. 1수용소와 제2수용소는 2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거의 10분 간격으로 다니는 셔틀이 있어서 쉽게 갈 수 있다.

 

 

오슈비엥침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를 오가는 셔틀 시간표

 

원래 계획은 이랬다.

 

자유 관람도 입장권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제1수용소에 가서 자유 관람 첫 시간인 오후 3시 관람권을 받아 두고, 그곳에서 바로 제2수용소로 가서 그곳을 찬찬히 둘러보고 오후 3시에 다시 와서 제1수용소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별 수 없이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지만 그나마 만만한 영어 투어는 1230분에 있다. 꼼짝없이 두어 시간을 기다렸다 들어간다.

 

 

 

오슈비엥침 제1수용소는 19405월에 지어졌다.

 

원래 폴란드 군의 부대였던 곳이다. 그 덕에 빨간 벽돌의 잘 지어진 막사들이 즐비하다. 28개의 건물이 있다. 여기에 가스실, 지하 감옥, 교수대, 생체 실험실 등이 대체로 잘 남아있다. 2차 대전 말 패색이 짙어진 독일군이 철수하면서 유럽에 산재한 대부분의 수용소들을 파괴했지만 이곳 오슈비엥침 수용소만은 미처 파괴하지 못하고 철수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곳 수용소 시설들이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나치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수용소에는 동시에 약 28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곳에 처음 수용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폴란드 양심수들이었고, 이후 들어온 사람들도 소련군 포로들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10블록과 11블록 사이의 죽음의 벽이라는 곳에서 수천 명이 총살되었다. 이후 총살하는 병사들의 정신적 충격을 방지하고 총탄을 아끼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스실 입구
가스실 내부
화장장

 

지금은 이들 막사 건물들이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수용수들이 지냈던 막사와 화장실 등이 온전히 보존되어 그때의 모습을 생생히 전해고 있다. 그들의 공간 곳곳은 잔인했던 전쟁 범죄를 알리는 전시관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투어와 인파에 밀려 잠시 스치는 눈길에도 그때의 참혹했던 모습들이 그려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두터운 철조망이 주는 위압감이 너무 크다.

 

내 발걸음을 가장 무겁게 만드는 것은 수용소와 막사 건물들을 숨막히듯 휘감고 있는 두터운 철조망이었다. 대부분의 철조망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고, 아마도 전기가 흐르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접근을 막는 해골의 경고문도 오싹하다.

 

 

 

투어로 둘러본 역사의 현장은 솔직히 실망스럽다.

 

현장이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투어로 이런 곳을 둘러본다는 것 자체가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투어 자체가 1시간 반 정도라 특정의 몇 개 전시관만 둘러볼 뿐만 아니라 앞, 뒤로 투어족이 있기 때문에 그냥 슥 하고 훑어보는 것이 다다. 무언가를 찬찬히 생각하고 느껴볼 시간은 전혀 없다. 더욱이 영어 가이드다 보니 영어를 들으려고 신경을 쓰느라 더욱 정신이 없다.

 

 

 

역사의 아픔을 느껴보고자 했지만 그런 시간은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그 시대, 그 순간에 이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졌을 극단의 공포와 분노, 슬픔 그리고 그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애절함을 이곳 역사의 현장에서 조금이나마 느껴보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다.

 

슥 하고 지나가며 보는 그런 모든 사진과 물건들은 이미 책에서 다큐멘터리에서 영화에서 수도 없이 봤다. 그래도 현장이 주는 무게감은 그 어떤 자료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인데...... 난 투어 내내 사람과 시간에 쫓겨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음에 이어서.......